본문/내용
Ⅰ. 서론
1. 츠빙글리, 칼뱅의 종교개혁의 역사적 위치
루터가 비텐베르크에서 종교 개혁을 진행하고 있던 것과 병행하여, 유럽의 각 곳에서는 종교 개혁의 흐름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루터와 거의 같은 시기에, 취리히에서 활동했던 츠빙글리의 개혁은 루터의 종교개혁과는 구분되는 또 하나의 갈래라고 할 수 있다.
츠빙글리의 개혁은 종교개혁에서 루터만한 반열은 아니지만, 스위스의 종교 개혁의 기반을 닦았다고 할 수 있다. 츠빙글리는 루터와 프로테스탄티즘의 기본원리- 오직성서와 오직믿음이라는 큰 원리를 공유하고 있었지만, 성경에 근거 하지 않은 모든 의식과 권위- 고해성사, 순례, 성인 숭배, 수도원 생활 등을 철저히 거부하고 파괴했다는 점에서 루터의 개혁보다 훨씬 엄격하고 급진적이었다.
루터와 츠빙글리가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의 초기를 대표했던 인물이라면, 칼뱅은 본격적으로 시작된 종교개혁을 공고화시킨 후속 종교 개혁자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초기 종교개혁자들의 이상적인 교회의 개념은 현실에서 실현될 근거를 갖고 있지 못했고, 교리상의 구호에 갖혀 있었다. 이상적 교회상이 현실에서 실현될 근거를 갖기 위해서는, 개혁에 현실적인 구속력을 부여하는 시스템이 필수적이었는데, 칼뱅의 개혁은 이러한 시스템 구축 - 교회의 정체(polity)를 수립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1)
2. 츠빙글리, 칼뱅 - 루터와의 차이: ‘국가관’, ‘교회관’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로, 세속과 교권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교황의 권위가 축소되고, 교회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세속 군주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 개혁가들은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국가’와 ‘교회’의 역할과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루터와 츠빙글리 칼뱅의 입장이 구분된다. 이러한 입장 차이가 왜 중요한가하면, 국가에 대한 저항권 인정 여부를 비롯한 정치적 입장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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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의 선구자 라는 평가를 중심으로 각 평가의 근거를 검토함과 함께, 칼뱅의 개혁을 액면그대로 평가하고자 한다.
Ⅱ.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1~1531.10.11)
1. 츠빙글리 사상의 배경
츠빙글리는 1484년 1월 1일에 투겐부르그(Toggenburg) 지방의 빌트하우스(Wildhaus)에서 탄생하였다. 1483년 말에 태어난 루터와는 채 두 달도 차이가 나지 않았다. 이런 그가 루터와 다른 사상을 가지게 된 배경은 스위스와 독일이라는 탄생지 외에도 몇 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츠빙글리는 어린 나이에 성직자였던 삼촌 바르톨로뮤에게 가서 공부를 시작으로 10세 되던 해 바젤의 Gregory Bunzli 학교로 , 12세에는 베른의 Henry Woliflin 학교에서, 14세에는 비엔나 대학에서, 18세에는 바젤 대학교에서 수학한다. 그 당시의 학교에 팽배해있던 사상은 스콜라주의였다. 이런 츠빙글리가 휴머니스트로 재탄생한 것은 1506년부터 십년간 머무르던 글라루스(Glarus)에서였다. 여기에서 그는 고전에 대한 기호를 키워나간다. 이는 후에 아인지델른(Einsiedeln)으로 옮길 때 가져가는 장서들에서 알 수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데모스테네스, 호머 등의 책과 자신이 단 주석들을 모두 가져간다. 이 시기의 츠빙글리와 서신을 왕래하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베아투스 레나누스(Beatus Rhenanus), 글라레안(Glarean)등으로 사제나 신학자라기보다는 주로 휴머니스트들이었다.2)
또 하나의 원인은 바로 애국심이다. 스위스는 역사적으로 유럽의 오지에 속하는 척박한 땅으로 농업과 산업이 발달하기 힘든 곳이었다. 하지만 험준한 지리적 조건에서 단련된 신체적 강인함으로 인하여 스위스인들은 오래전부터 용병으로 재정적 수입을 충당하였다. 이러한 전통적인 용병제도는 찰스5세와 프랑수와1세의 전투에서 양쪽에 팔려감으로써 동족끼리
살상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츠빙글리의 용병 제도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