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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국 임시 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영어: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1919년 ~ 1948년)는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선포된 31독립선언에 기초하여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 침탈과 식민 통치를 부인하고 한반도 내외의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1919년 4월 13일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설립된 망명 정부 형태의 독립운동 단체(임시 정부)였다. 같은 해 9월 11일에는 각지에 설립된 임시정부들을 흡수통합하여 통합임시정부로 발전하였다. 줄여서 임정(臨政)이라고도 부른다.
설립과정
설립의 준비
상하이는 교통이 편리하고 쑨원이 이끄는 광동정부의 지원도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또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의 조계가 있어서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조건도 갖추고 있었다. 독립지사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우호적인 프랑스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 조계에 살면서 활동을 펼쳐나갔다. 이런 까닭에 독립지사들이 상하이로 몰려들었다. 1918년 조직된 신한청년당은 1919년 1월 파리 강화 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여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상하이는 31 운동의 진원지이기도 하였다.
상하이의 독립지사들은 1919년 여름부터 더욱 민활하게 움직였다. 신규식을 비롯하여 서병호, 여운형, 조동호, 박찬익, 선우혁 등은 한국과 만주, 연해주, 미주에서 몰려드는 지사를 맞이하기에 바빴다. 상하이의 독립지사들은 프랑스 조계를 중심으로 외지에서 온 사람들의 숙소를 마련해 주고 고려교민친목회를 조직하여 교민 상호간의 긴밀한 연락망을 만들었다. 이 무렵 만주와 연해주의 이동녕, 이시영, 김동삼, 신채호, 조성환, 조소앙 등 명망 높은 독립지사가 상하이로 와서 자리를 잡았고, 한국에서 현순, 손정도 등이 이곳으로 파견되었다.
상하이시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자취
신한청년당은 파리강…
31 운동 직후 국민의 의사를 대표할 의결 기관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국내외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널리 확산되었다. 그러나 고종과 순종이 건재하고 있어서 망설이는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
년당이 주축이 되어 29인의 임시의정원 제헌의원이 모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그 후 22일엔 2차의정원 의원 57인이 참석하여 국내의 8도 대표와 러시아, 중국, 미주 등 3개 지방대표가 각각 지방선거회를 통해 의정원 의원을 선출했다. 의장에는 이동녕, 부의장에는 손정도를 선출했다. 의정원은 법률안 의결, 임시대통령 선출 등 국회와 같은 기능을 했다. 1919년 4월10일 의정원 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민주공화제를 골간으로 한 임시헌장을 채택한 뒤 선거를 통해 국무원을 구성했다. 행정수반인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추대하고 내무총장에 안창호, 외무총장에 김규식, 군무총장에 이동휘, 재무총장에 최재형, 법무총장에 이시영, 교통총장에 문창범 등 6부의 총장을 임명한 뒤 4월 13일 정부수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4월 11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는 주장도 있다.
같은 시기에 경성(서울)에서는 한성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연해주에서도 대한국민의회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자연스레 상하이의 임시정부는 통합문제를 제기하였다. 통합교섭은 대한국민의회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이에서 진행되었다. 현실적으로 국내와는 연락을 할 수 없었고 미국에 있는 이승만과도 상의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대한국민의회의 대표로 선정된 원세훈이 상하이로 와서 교섭을 벌였다. 양쪽 모두 정부의 위치를 자기 지역에 두되 산하의 부서만 양쪽에 배치하자는 주장을 폈다. 두 주장이 팽팽히 맞섰지만 그에 못지않게 단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열망도 높았다. 결국은 상하이 임시정부에 통합되었다.
설립 참여자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 당시의 참여자는 여운형, 손정도, 조소앙, 김철, 선우혁, 한진교, 신석우, 현순, 신익희, 조성환, 이광, 최근우, 백남칠, 김대지, 남형우, 이시영, 이동녕, 조완구, 신채호, 진희창, 신철, 이영근, 조동진, 김동삼, 김규식 등 30인이었다.
그 밖에 김구, 이동녕, 신규식 등이 설립에 참여하였고, 안창호, 이동휘, 이승만 등이 1919년 4월에서 9월 사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