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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419 혁명(四一九革命)은 1960년 4월 대한민국에서 제1공화국 자유당 정권이 이승만을 대통령에 당선시키고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개표조작을 하자, 이에 반발하여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학생들의 시위에서 비롯된 혁명이다.
315 부정 선거의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던 시위는 시위대 중의 한 사람으로서 3월 18일경에 실종되었다가 시신에 최루탄이 박힌 채 경상남도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른 김주열의 시신이 4월 11일 부산일보 허종 기자가 작성한 기사를 통해 공개되면서 더욱 격화되었다.
4월 19일 경찰은 경무대에 몰려든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발포 이후 시위대는 무장을 하여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며 맞서기도 했다.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책임을 지고 하야했으며 부통령 당선자였던 이기붕의 일가족은 사퇴 후 동반 자살했다.
419 민주혁명 혹은 419 학생운동, 419 의거, 4월 의거, 4월 혁명, 미완의 혁명 등으로도 일컫는다. 516 군사정변 이후 군사정권에서는 `의거`(義擧)로 불리다가 문민정부부터 다시 혁명으로 승격되었다
개요
1960년 1월말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선거 운동 도중 신병 말기라는 판정을 받게 되어 하와이 병원으로 급히 갔으나 결국 선거 한달 전인 2월 25일 신병 치료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갑자기 사망하여 이승만이 단독 후보가 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인 장면은 건재하였고, 이 소식을 듣는 자유당은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어느 선거보다도 부정선거활동에 열을 올렸다. 정부로 하여금 공무원을 통한 선거운동망을 조직하고, 전국 경찰에 지시하여 이를 감시독찰하도록 하는[4] 등 선거에 승리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였다.
2월 28일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이 “학원의 자유 보장하라”, “독재정치, 부정부패를 물리치자…
경과
315 의거
증언
로에 모여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를 벌였다.
제2차 마산시위
4월 11일, 마산시위 때 행방불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체가 바다에서 발견되어 검시가 이루어졌는데, 검시 결과가 발표되지 않자 시민들이 병원으로 들어가 눈에서 뒷머리까지 최루탄이 박혀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 김주열 시체 인양사건이 알려지면서 당시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되어, 부정선거 시정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된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날 시위대는 마산경찰서 무기고 문을 파괴하고 수류탄 1~3를 탈취했으며 경찰서장실 앞뜰에 투척 폭발시켰다.
418 고려대학생 피습 사건
1960년 3월 15일의 부정선거를 계기로 마산을 시발점으로 하여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학생 데모에 호응, 서울에서는 4월 18일 고려대학생 3,000여 명이 구속학생의 석방과 학원의 자유보장 등을 요구하면서 시가를 행진하였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데모를 벌이다가 고려대학교 유진오(兪鎭午) 총장의 만류로 하오 4시쯤 데모를 중단하고, 귀교 도중 종로 4가 천일백화점에서 대한반공청년단 소속의 폭력배들에게 피습을 당하면서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증언
`4월 11일 마산에서 김주열 학생 시신이 발견된 게 도화선이 됐죠. 서울 지역 총학생회 간에 물밑 논의를 통해 19일 오전 9시 일제히 경무대와 중앙청 앞에 집결하는 것으로 행동 지침을 정했습니다. 경무대 앞엔 대학생만 2만여 명을 헤아릴 만큼 엄청난 군중이 몰렸습니다. 여기에 경찰이 무차별 총격을 가하면서 많은 희생자가 났습니다(사망 21명, 부상 172명). 과잉 진압은 국민을 격노시켰고, 결국 엿새 후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과 대통령 하야로 이어졌습니다.`
민주당의 대응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 규탄시위에 민주당 측에서는 윤보선 등이 부상당한 학생을 위문하였다. 4월 학생 시위의 진상조사단이 각 정당별로 꾸려질 때 그는 민주당측 부정선거 규탄사태 진상조사단장이 되어 마산과 부산, 창원 등을 순방하고 돌아왔다. 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