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합방(경술국치) 100주년
1910년 8월 22일에 대한제국 순종황제가 형식적으로 참석한 어전회의에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제 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한다. 이유는 “상호의 행복을 증진하고 동양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은 “이를 위해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함이 선책한다”고 주장했다. 명분 이면에는 한국침략에 머무르지 않고 중국까지 영토를 확장하려는 야욕을 숨기고 있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통치권을 잃은 상태였다고 해도 한일 강제 합방이 국내외에 공포된 날부터는 실질적인 변화가 바로 나타났다. 나라가 없어졌으니 그 이름 ‘대한(大韓)’은 금기어가 됐다. 대한신문은 한양신문으로 바뀌었고, 대한매일신보는 매일신보로 제호를 바꿔 총독부의 기관지로 전락했다. 황성신문이 한성신문으로 이름을 바꾼 이유는 순종 융희 황제가 창덕궁 왕으로 격하된 것과 같은 이유다. 대한제국에 ‘황제’는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고위 관리는 새로운 시대의 영광스러운 지위를 얻고자 분주했다. 강제병합에 협력한 왕의 친인척은 귀족으로 작위를 받고 기뻐했다.
졸속으로 나라가 넘어간 과정은 두고두고 문제가 됐다. 일본은 조약문에 형식적인 문제가 없고, 국제법을 준수했다며 합법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한국을 비롯해 타국은 조약의 형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박배근 부산대 교수는 “강제로 체결했기 때문에 절차에 문제가 있고 당시 국제법 개설서를 분석한 결과 그 형식에도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국가 대표를 강압적으로 체결에 떠밀었으며, 조약문에 황제의 비준 서명이 없고, 국가 원수가 대표를 임명한 전권위임장도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55년이 지난 1965년 한일 양국은 한일기본조약에서 한일병합조약이 무효임을 확인하며 한일관계를 진전시켰다. 그러나 독도 영유권 문제, 위안부 보상 문제 등이 잊을 만하면 불거져 과거사 청산의 불완전성을 드러냈다. 전문가들은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는 올해야말로 5…(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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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은 죽음으로 항거하였으며, 민종식(閔宗植), 최익현(崔益鉉), 신돌석(申乭石), 유인석(柳麟錫) 등은 일본에 저항하는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헤이그에 밀사(密使)를 파견하는 등 을사조약이 강압에 의한 무효임을 알리는 외교 활동도 전개되었다.
한일합방(경술국치)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을 상실한 1910년의 경술국치 전반을 이르는 말.
한일 병합 조약(韓日倂合條約, 일본어: 日韓倂合約 にっかんへいごうじょうやく)은 1910년 8월 22일에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맺어진 합병조약(合倂條約)이다.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와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조약을 통과시켰으며, 조약의 공포는 8월 29일에 이루어져 대한제국은 이 길로 멸망하게 된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실질적 통치권을 잃었던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에 편입되었고,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다. 한국에서는 이를 경술국치(庚戌國恥)라고도 부른다.
특이한 점은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성립한 당시에는 조약의 이름이 존재하지 않았고, 순종이 직접 작성한 비준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개항 초기 조선을 둘러싼 청나라와 각축전을 벌이던 일제는 1894년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하였다. 이에 일제는 조선에서 우월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아울러 일제는 러일전쟁과 동시에 1904년 2월 대한제국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러한 군사력에 기초해서 대한제국 정부를 위협하여 ‘한일의정서(韓日議政書)’를 체결하였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일제에게 군사적 목적을 포함한 모든 편의를 제공하였으며, 많은 토지와 인력도 징발당하였다.
일제는 같은해 8월에는 제1차 한일협약(한일협정서)을 강제로 체결하여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고문을 재무와 외무에 두어 재정권과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또 일제는 대한제국 식민화를 앞두고 열강의 외교적 승인을 얻는 공작에 전력을 기울여, 미국과는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밀약[桂太郞-Taft密約]’을, 영국과는 8월에 제2차 영일동맹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