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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해양사 - 일본의 항해와 조선
◑태고부터 전국시대까지
옛날의 죠몬시대에 한국 선조의 일부는 바다를 건너 일본 열도에 왔던 사람들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일본의 동쪽 방면에는 쿠로시오 해류가 흐르고 있기 때문에 남쪽에서 뗏목이나 나무를 도려내어 만든 작은 배로 일본에 힘들게 도착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한반도와 땅이 연결되어 있었을 당시 걸어서 일본에 왔던 사람들에 더하여, 반도와 일본이 분리된 뒤에는 배로 해협을 건너서 산인해안과 기타큐슈에 왔던 사람들, 어쩌면 중국대륙으로부터 동중국해를 건너 큐슈에 가까스로 도착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죠몬시대 일본인이 사용한 환목선은 기껏해야 5내지 7미터 정도의 길이로 진자의 원리를 완력으로 사용하는 삿대를 사용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죠몬시대의 사람들 쪽이 야요이시대 사람들보다 적극적으로 바다에 나간 것 같다. 해이안시대부터 가마쿠라시대에는 우선 “후쿠자이쿠리후네” 라는 삼나무나 녹나무의 목재를 못과 빗장으로 이어서 연결한 배가 사용되었고, 이윽고 노와 선미의 키가 사용되게 되었으며, 더욱이 현측외판을 붙이는 기술이 발달하여 길이 20미터, 적재량 20톤 정도의 배가 사용되게 되었다. 겐페이단노우라 전투와 원나라의 침략을 막기 위해 사용되었던 것도 이러한 배이며, 전쟁용의 특별한 배는 없었다.
일본세기를 비롯한 고대의 사서에는 한반도와 중국 본토에 생겨났다 멸망한 국가들, 그리고 7세기 말부터 200년 남짓 계속된 연해주의 일부를 포함하는 중국 동북부의 발해라는 국가와 일본 사이에 교류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중국의 사료에 기초하면 왜라는 나라가 2세기 초에 생겼는데, 한 왕조, 위 왕조, 진 왕조와 일종의 조공 내지 외교관계가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이들 국가들로의 항행도 이루어졌던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6세기부터 7세기에 걸쳐 백제와 왜왕의 정권이 함께 신라와 당의 연합군과 …
또한 13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국제
를 징수하 사설군으로, 해적이기도 하고 밀무역 집단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일본에서 기록에 남아있는 최초의 본격적이면서 대규모의 해적군은 소위 “쇼헤이덴교의 난” 때, 도고쿠의 다이라노 마사카도가 일으킨 반란에 대응하여 본래 해적토벌을 조정으로부터 명을 받은 후지와라노스미토모가 명령을 거스르고 세토내해 해적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이끈 반란군이다. 스미모토는 941년에 패사하고 말았다.
그 후 다이묘를 위해 모인 해적을 수군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일본내에는 무라카미수군, 마쓰라당, 구마노수군 등이 세토내해.큐슈연안.와카야마현 등에 할거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크고 작은 700여 개의 섬과 암초가 있는 세토내해는 해적의 소굴이었다. 그러한 지역을 근거지로 하여 무사들은 원나라의 침략 시절 큰 활약을 했지만, 그 후 원에 대한 복수라는 동기, 게다가 조공 무역 이외에는 인정하지 않는 해금정책을 취한 명조에 대한 반발로부터 한반도, 그리고 중국대륙 연안을 습격했고, 난징에까지 진격한 예도 있다.
또한 왜구의 활동은 크게 13세기부터 15세기 전반에 걸쳐 주로 식량과 노동력을 강탈하기 위해 한반도를 습격한 전기와 약간의 중단기간을 두고 주로 중국 연안을 습격한 16세기 후기로 나누어지는데 후기의 경우는 “왜” 라고 부르면서 중국계의 해적들도 많아서 이들을 “위왜” 라고도 불렀다.
전국시대 후기에 방화목적으로 배에 얇은 철판을 깔거나 배에 대포를 싣기 시작한 것은 오다 노부나가이다.
나가시노 전투에서 총의 사용과 함께 노부나가의 독창성을 나타내고 있다. 노는 배의 크기에 따라 양 현 합계
가 50~160정, 1척에 평균 대포 4문, 철포 50정 정도의 무장을 하고 있다. 왜구가 금지된 것은 158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바한금지령, 해적정지령”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일본에 있어서 해상의 전력은 계속 “수군”
이라고 불리고 있었으나, “해군”이라는 호칭이 정식으로 시작된 것은 도쿠가와 막부말기 때의 일이다.
또한 13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