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북학파 중 홍대용과 박제가의 사상
1. 서론
실학파는 주자학파와 더불어 근세 한국사상사의 2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제 2기의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에 와서는 주자학의 이념에 대해서라기보다는 주자학파의 대해 날카로운 비판과 거부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실학파의 근본입장은 반주자학적인 데서 찾으려 하기보다는 실학파의 문제의식이 갖는 특성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데에서 찾아질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주자학이 유학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곧 양자는 유학이라는 공동기반 위에서 서로 다른 관심의 영역을 가졌고, 따라서 다른 방법론을 보여주고 있는 점에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실학 2기의 철학자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는 북학파, 또는 이용후생학파라고도 불리며 이른바 도시 상공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실학파라고도 볼 수 있으며, 이들은 적극적으로 선진기술 도입 및 인간균등, 주체의식을 기초로 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홍대용과 박제가의 사상적 배경과 그들의 업적 및 사상적 특징을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2. 당시의 국내사정
조선사회는 18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더욱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였다. 봉건적 제도의 문란, 중앙집권적 봉건통치체제의 가일층의 약화, 각종 사회의 모순의 증대, 자주성을 옹호하기 위한 농민들의 투쟁의 격화,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생, 발전, 이 모든 것은 봉건사회를 붕괴에로 이끌어갔다. 18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봉건국가의 기본생산수단인 토지에 대한 제도는 더욱 문란한 상태에 놓여있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화폐 경제의 발전에 따르는 토지의 사유화가 더욱 촉진되었다. 화폐경제의 발전은 상업자본의 장성과 함께 고리대자본으로 양반관료, 지주, 상인들의 치부욕을 더욱 자극하였으며 토지의 독점을 더…
3.담헌 홍대용 (湛軒 洪大容)
그들의 사상과 사회개혁안은 전통적 봉건유교사상과 봉건국가적 이해에서 해방되지 못하였으며 양반계급적 입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제한적인 것이었다.
3.담헌 홍대용 (湛軒 洪大容)
지금까지 알려진 범위 안에서 조선 후기 실학의 가장 대표적인 학파를 꼽는다면 하나는 유형원, 이익, 정약용 계요, 또 하나는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계이다. 홍대용은 시대적으로 이익과 정약용의 중간에 위치한다. 흔히 북학파라고 하면 박지원이 문장으로 이름이 높기 때문에 박지원을 먼저 드는 일이 많으나 홍대용은 박지원보다는 나이도 6세나 많고, ‘북학’의 바탕이 되는 북경견학도 박지원보다 15년이나 앞서며, 또 홍대용의 ‘燕記’는 정약용의 평과 같이 연암의 ‘열하일기’가 실상 이에서 지시를 받은 것이며 박제가의 ‘북학의’ 또한 이에서 준도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담헌 홍대용은 영조 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35세 되던 영조41년 그는 당시 지식인들이 부러워하던 북경견학의 기회를 얻었었다. 그는 당시 노론학파의 중심적 위치에 있었던 사림의 한 사람인 金元行을 스승으로 모시고 전통적인 주자학의 소양을 쌓았지만, 한편으로는 이때 이단시 되어있던 양명학에도 깊은 이해가 있었다.1) 정인보는 홍대용을 가리켜 ‘양명학을 일언반구 제기한 일이 없되, 그의 주체되는 정신을 보면 양명학임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홍대용(1731-1783)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실학의 대표자의 한사람이며 이름있는 유물론 철학가이며 자연과학자라고 말할 수 있겠다.
홍대용은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양반가문 출신이며 시직, 군수, 사헌부 감찰 등의 벼슬을 하였으나 주로 학문연구에 일생을 바쳤다. 홍대용은 학문에 대한 실학적 태도로부터 출발하여 당시 관학으로서의 주자성리학을 비판적 안목으로 대하고 남달리 자연과학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실학사상 발전에 새로운 단계를 열어놓았다.
그는 주자성리학을 비롯한 모든 학설에 대한 절대적 권위를 부정하고 독자적인 실학적 학풍을 수립하였다. 그는 자기에게 유교의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