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프랑스에서 ‘양자제’의 이념과 실상
Ⅰ. 머리말
Ⅱ. 법적 측면에서의 양자제
1. 고전기 로마법에서의 양자제
2. 중세 교회법에서의 양자제
Ⅲ. 실천적 측면에서의 양자제
1. 양자제의 존재 양태
2. 양자제와 친족 구조
Ⅳ. 맺음말
Ⅰ. 머리말
조상숭배, 가문명과 가산의 계승과 상속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고전적 의미의 로마 양자제가 다른 시대에 어떤 형태로 존속했는가 하는 문제는 해당 시대의 결혼과 가족 구조, 남녀의 역할과 지위, 친족 구조, 사회적 연대 형태 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중세에 양자제가 존재했는가에 대해 친족제 연구가들은 서로 다른 견해를 보여왔다. 잭 구디(J. Goody)는 중세초부터 19세기말까지 유럽의 세속법과 종교법에서 양자제가 장기간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고대말에 양자제에 대한 세속법의 성격은 급격하게 변화했으며, 중세초에 양자제 법은 “매우 갑작스럽게” 소멸했다는 것이다.1) 반면에 다른 친족제 연구가들은 중세에 고전기 로마와 같은 양자제 법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데 동의하면서도, 법과 실천의 차원에서 양자제가 중세에 완전히 소멸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12~16세기 양자제에 관련된 법을 연구한 루미(F. Roumy)는 중세에 양자제에 대한 법률적 논의가 풍부했으며, 이러한 법률적 구조물은 양자제의 실천을 반영한 것이라 주장한다.2) 또한 근대초 프랑스 양자제를 연구한 게이저(Kristin E. Gager)도 근대 이전의 양자제 법의 변천을 개관하면서 법전에만 의존하는 양자제의 역사는 진상의 한 면만 보는 것이라 비판한다. 프랑스에서 중세에 양자제가 민중적 실천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법에서도 완전히 소멸한…(생략)
Ⅱ. 법적 측면에서의 양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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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이고, 다른 하나는 생부의 동의 아래 다른 사람의 ‘부권’에 들어가는 ‘본래적 의미’의 입양(adoptio)이다.7) 고전기 로마법에 의하면, 양자는 새가문의 완전한 적통으로 들어가서 친자의 권리와 상속권을 부여받았다.8) 양자 입양의 목적은 가문 숭배와 이름의 계승을 통한 가문의 소멸을 막는 것이 기본이지만, 상류층과 황실에서는 보호-피보호 관계망의 공고화, 황위 계승 확보 등과 같은 사회적정치적 목적을 띠기도 했다. 카이사르가 옥타비아누스를, 아우구스투스가 티베리우스를, 클라디우스가 네로를 양자로 삼은 것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로마에서 양자제가 보편화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마의 ‘가족’(familia) 구조를 살펴보아야 한다. 비록 친족 유대를 형성함에 있어서 생물학적 유대가 기본적 역할을 했지만, 가족 유대는 양자제와 같은 법적 구축물을 통해서도 형성될 수 있었다. 로마는 후대에 비하여 친족 집단의 형성에서 상당한 자유를 누렸다. ‘가부장’(paterfamilias)은 유언을 통해 상속자를 지명하는 데 있어서 자유로웠다. 한 가문에 태어난 어린이가 자동적으로 종원(宗員)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정실에서 태어난 신생아를 버릴 것인가 살릴 것인가, 상속자로 삼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가부장’의 권한이었다. 로마의 이러한 ‘자의적 부권’(voluntary fatherhood) 개념은 첩의 자식을 양자로 삼을 수 있게 만들었으므로 서출이 적출과 확연하게 구별되지도 않았다. 이런 점에서 로마 가족은 후대에 비해 생물학적 실체라기보다는 ‘가부장’에 의해 결정되는 법률적 집단이었다. 베인이 지적하듯이, “양자제의 빈번한 실천은 혈통이 로마의 가족 개념에서 하찮은 역할을 한 또 다른 증거이다.”9) 이처럼 공화정말과 제정초의 양자제는 ‘자연 친자관계’(filiation naturelle)의 기본 준칙을 와해시킬 정도로 발전했다. 그렇다고 해서 양자제와 자연 친자관계가 적대 관계는 아니었다. 이혼이 로마식 결혼의 한 요소였던 것처럼10) 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