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차례
한 편의 친일시도 거부한 천재 시인 오장환
차 례
Ⅰ. 서 론
Ⅱ. 본 론
1. 오장환의 생애
2. 오장환의 작품 이해
가. 광복 전 작품
나. 광복 후 작품
다. 월북 후 작품
Ⅲ. 결 론
Ⅰ. 서 론
오장환은 서정주, 김동리, 함형수, 김상원 등과 함께 시인부락 동인으로 출발했다. 그는 조숙한 시인으로 월북하기 전까지 많은 시작품을 남겨 우리 현대시사에 큰 공정을 남겼다. 그러나 그를 월북문인이란 명목으로 오랫동안 철저히 금기해 왔기 때문에 전혀 논의조차도 할 수 없었다. 다행히 1988년 납월북문인들이 해금되어 작품집의 간행은 물론,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이에 관심하는 사람들 모두가 느끼는 공통점은 그 해금조치가 너무 늦었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활동했던 문인 몇 명을 제외하고는 그의 전기적 사실을 밝혀줄 만한 사람들이거의 죽었기 때문에 그 연구에 무척 어려움이 뒤따른다.
오장환의 경우, 전기적 사실을 추적하기...
본문/내용
한 편의 친일시도 거부한 천재 시인 오장환
차 례
Ⅰ. 서 론
Ⅱ. 본 론
1. 오장환의 생애
2. 오장환의 작품 이해
가. 광복 전 작품
나. 광복 후 작품
다. 월북 후 작품
Ⅲ. 결 론
Ⅰ. 서 론
오장환은 서정주, 김동리, 함형수, 김상원 등과 함께 시인부락 동인으로 출발했다. 그는 조숙한 시인으로 월북하기 전까지 많은 시작품을 남겨 우리 현대시사에 큰 공정을 남겼다. 그러나 그를 월북문인이란 명목으로 오랫동안 철저히 금기해 왔기 때문에 전혀 논의조차도 할 수 없었다. 다행히 1988년 납월북문인들이 해금되어 작품집의 간행은 물론,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이에 관심하는 사람들 모두가 느끼는 공통점은 그 해금조치가 너무 늦었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활동했던 문인 몇 명을 제외하고는 그의 전기적 사실을 밝혀줄 만한 사람들이거의 죽었기 때문에 그 연구에 무척 어려움이 뒤따른다.
오장환의 경우, 전기적 사실을 추적하기란 그리 쉽지가 않았다. 그 가까운 친척들은 모두 흩어져 실종되었고, 그가 살았던 마을에서 그를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리하여 오장환이 태어나서 유년기를 보낸 회인과 안성지방을…
을 결성하면서 그의 왕성한 시작활동이 시작된다. 시집『성벽』과『헌사』시편들 대부분이 이 기간에 쓰여진 것들이다.
오장환은 시인부락 동인의 활동에 열의가 대단했다. 작품수도 그렇거니와, 원고수집 및 기타 동인활동의 본거지를 운니정 24번지 오장환의 집으로 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도 그렇다.
1938년 부친이 사망하고 나 얼마 뒤 오장환은 거처를 돈암정 105번지로 옮기게 된다. 아마도 부친이 사망한 후 집을 정리해서 어머니는 안성으로 내려갔고, 오장환은 돈암정에 거처하면서 남만서방을 경영한 것으로 보인다.
오장환은 815해방을 병원에서 맞았는데, 이 후 1948년을 전후해서 오장환이 월북할 때까지의 행적에 대해서는 불확실한 점이 많다. 오장환이 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남한정부의 수립직전인 1947년 12월경에 월북한 것이다.
당시 오장환의 작품활동은 815해방 이후 3년간이 가장 왕성했었는데,『나 사는 곳』과『병든 서울』 등 두 권의 창작시집과 역시집『에세-닌 시집』을 출간한 이외에도 신문이나 잡지에 많은 시작품을 발표했다. 이 기간은 오장환에게 문단할동에 대한 의욕이나 열의가 한층 고조되어 있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일제치하에서 벗어난 해방감과 의식공간이 확대되어 있었던 시대상황이 그로 하여금 가슴을 한껏 부풀게 하였는지 모른다.
일제 말, 극도의 억압정책에 못 이겨 많은 지식인들이 변절하여 친일 아부하는 등 갖은 추태를 보인데 반해 오장환 그 자신은 최하층의 생활을 하면서도 그런 추태를 부리지 않고 살았음을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 어려운 때를 큰 잘못 없이 지내게 된 것은 오로지 시작에만 몰두해 있었기 때문이다.
815해방 직후, 오장환은 문학가동맹에서 활동하며 좌익사상이 담긴 시편들을 썼는데, `연안延安서 오는 동무 심沈에게``공청共靑으로 가는 길``벽보壁報``승리勝利의 날`등이 이에 해당한다. 특히 `승리의 날`은 노동절을 기념하기 위해 쓴 작품이다.
오장환이 월북한 것은 남북한이 각기 정부를 수립하기에 앞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