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고졸 학력의 심리학자
에릭슨
목 차
고등학교만 졸업한 에릭슨
방황을 끝낸 에릭 선생님
하버드 심리학 연구소 연구원
학위 없는 하버드 대학 교수
자아 심리학론을 개척한 신프로이트 학파
위기를 경험하는 사람들
프로이트의 세계를 확장시킨 심리학자
아동이 성장하면서 겪는 자아 양식의 위기와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을 성격 발달의 중요한 요인이다.
-에릭슨(Erik Homburger Erikson)
사람들은 어떤 발달 과정을 거치는가 사람들의 사회성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사회성 발달 단계 연구와 청소년기를 정체감 혼란, 정체감 위기라는 말로 표현하며 우리에게 알려진 심리학자이다. 그는 1902년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근교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덴마크 사람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유태인이었다. 그의 부모는 그가 태어나기 몇 달 전에 이혼했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는 친구들 곁에서 아이를 기르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이사를 했다. 거기서 에릭슨의 어머니는 혼자서 에릭슨을 키우다가 데오도르 홈부르거라는 유태계 소아과 의사와 재혼했다.
에릭슨의 어머니와 의부는 유태인이었지만, 에릭슨은 친아버지를 닮아 유태인과는 전혀 다른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키도 크고 북유럽 사람처럼 금발에 눈이 푸른 그는 덴마크인을 더 닮았기 때문에 유태 소년들 사이에서 ‘이교도’(비유태인이라는 뜻)라는 별명으로 불려졌다. 그러나 이런 왕따 경험들은 후에 에릭슨이 정체성 위기와 혼미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에릭슨은 어렸을 때 홈부르거 의사가 양부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어느 정도 자란 후에야 자신의 아버지가 양부라는 사실을 알게 된 에릭슨은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1939년 미국 시민으로 귀화했을 때 그는 원래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만 졸업한 에릭슨
다른 심리학자…
1933년 에릭슨 가족은 코펜하겐으로 가서 덴마크 시민권을 다시 얻어 그 나라의 정신분석 교육기관 설립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은 히틀러의 출현으로 파괴되었고, 그들 가족도 유럽을 떠나야만 했다. 결국 그들은 미국 보스턴에 정착을 했으며, 거기서 에릭슨은 그 도시 최초의 아동분석가가 되었다. 그 지역에는 아동분석가가 없었기 때문에 에릭슨의 활동은 곧 널리 알려졌고, 에릭슨은 마침내 그 지역의 첫 아동분석가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그 다음 이 년 동안 보스턴에서 개업을 했고 일년 동안 하버드 의대에서 신경정신과의 심리학 연구원으로서 임상 및 학술직을 맡았다. 그는 하버드 대학 심리학 박사 과정에 등록했으나 몇 달 위에 취소했다. 보스턴에 있는 동안 에릭슨은 하버드 심리학 연구소에서 TAT 투사 검사의 창안자인 헨리 머레이와 잠시 일하기도 했다.
학위 없는 하버드 대학 교수
1936년에서 1939년까지 에릭슨은 인간관계 연구소와 예일 대학교 의대 정신과에 재직했는데, 여기서 그는 그가 추구하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연구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받았다. 그 기간동안 에릭슨은 문화인류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38년에는 수(sioux) 인디언들이 어떻게 그들의 자녀를 양육하는지 관찰하기 위해 남부 다코다(south Dakota)에 있는 파인리지 부락으로 조사 여행을 떠났다. 또한 시간을 내어 다른 인디언족인 유록 어부들을 연구하기 위해 캘리포니아 해안을 여행하기도 했다.
에릭슨은 프로이트가 손대지 않았던 미지의 영역을 연구했는데 그것은 바로 상이한 문화적 여건에서 자라는 아동들의 생활과 정상 아동들의 생활에 관한 것이었다. 1939년 샌프란시스코로 옮겨 아동분석 연구를 다시 시작했고, 1942년까지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심리학 교수로 있었다. 바로 그 대학에서 그 유명한 아동 지도에 관한 종단적 연구에 참여했다. 에릭슨은 프로이트가 밝혀 내지 못한 다양한 문화권에서 성장하는 정상적인 아동들의 삶을 찾아 내려고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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