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인물 사상] 백범 김구의 생애와 사상
목 차
1. 백범 김구의 생애
2. 백범 김구 선생 연보
3. 고난과 역경의 파고
4.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의 활동
5. 광복이후의 활동
6. 백범 김구의 사상
7. 백범 김구 선생에 관한 소고
1. 백범 김구의 생애
백범은 15세에 한학자 정문재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1893년(고종 30년) 동학에 입교하여 접주(교구 또는 포교소의 책임자. 포주 또는 장주라고도 함)가 되고 1894년 팔봉도 소접주가 되어 동학혁명군에 가담하여 싸웠으나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으로 패배하였다. 동학혁명군이 패배한 그 다음해부터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날 즈음, 백범은 비록 소년 장군의 몸이었으나 동학에서 불 붙어온 왜놈에 대한 적개심으로 왜놈 장교를 맨손으로 때려 눕혔다. 그리고 그의 칼을 빼앗아 왜놈의 가슴에 꽂고 거기서 흘러 나오는 피를 빨아먹은 사건은 너무나 유명하다. 백범의 의로운 행위는 비단 개인의 그것이 아니라 우리 민중의 성향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백범은 을미년 명성황후 살해 사건 때 일인에게 시해 당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고 자 일본 육군 중위 쓰치다를 살해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 종의 특사령으로 감형되었다. 복역중 1898년에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의 중이 되었다가 18 99년 환속, 1903년 크리스트교에 입교하였다. 1909년 안악 양산학교 교사로 있다가 1910년 신민회에 참가하고, 1911년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체포…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
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를 수립
하는데 협력하지 않겠다.
2. 백범 김구 선생 연보
8년 초에 북한이 국제연합의 남북한총선거감시위원단인 국제연합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함으로써, 선거가능지역인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김구는 남한만의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 수립에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8월 15일과 9월 9일에 서울과 평양에 각각 세워진 뒤에도 민족분단의 비애를 딛고 민족통일운동을 재야에서 전개하던 가운데, 이듬해 6월 26일 자택 경교장(京僑蔣)에서 육군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7월5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고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추서되었으며, 4월 의거 뒤 서울 남산공원에 동상이 세워졌다. 저서로는 「백범일지(白凡逸志)」를 남겼다.
2. 백범 김구 선생 연보
1876. 1세 황해도 해주읍 백운방 텃골(현 황해도 벽성군 운산면 오담리 파산동)에서 출생하다(8.29) 아버지 김순영(金淳永), 어머니 곽낙원(郭樂圓), 아명은 창암(昌巖) 1878. 3세 천연두를 앓다. 1880. 5세 강령(康翎) 삼거리로 이사하다. 1882 . 7세 해주 본향 텃골로 다시 이사하다. 11884. 9세 조부상(祖父喪)을당하다. 한글과 한문을 배우다. 1887. 12세 한학을 배우다. 1889. 14세 [통감], [사략] 병서(兵書)를 읽다. 1890 . 15세 학골 정문재(鄭文哉)의 서당에서 [당시(唐詩)]. [대학(大學)]을 배우는한편 과문(科文)을 익혀 과거에 응시할 준비를 하다. 1892. 17세 조선의 마지막 과거인 임진경과(壬辰慶科)에 응시하고자 해주로 갔으나, 매관매직을 일삼는 당시의 부패한 과장(科場)을 보고 실망하여 돌아오다. 풍수와 관상 공부에 몰두하다. 1893. 18세 동학교도 오응선(吳膺善)의 종지(宗旨)를 듣고 동학에 입도, 포교에 힘을 기울이다. 이름을 창수(昌洙)로 고치다. 1894. 19세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을 만나 접주(接主)라는 첩지를 받고 의암 손병희를 만나다. 동학교도들과 해주성(海州城)을 습격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