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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 속의 인물과 사상
비운의 군주, 고종
나는 고등학교 국사시간 때 우리의 역사에 대해 배우면서 고종이 집권하던 시기를 가장 재밌게 받아들였다. 본격적으로 우리 역사가 근대에 들어서는 시기이기도 하였지만 그 개혁의 뿌리가 이어지지 못한 채 일본에 의해 우리의 국권이 상실되면서 전국가적인 고통을 받았던 시기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흔히 고종하면 떠오르는 인식들은 아버지인 흥성대원군의 그늘에 갇혀있는 공부가 또는 그의 아내였던 민비의 치맛자락 속에 있는 공처가의 모습을 떠올리거나 서구 열강과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적절히 방어하지 못한 채 각종 이권과 국권을 빼앗긴 무능한 왕을 떠올리게 된다.(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그렇다.)
수 천년의 긴 시간을 지내오는 동안 숫한 외세의 침입을 받긴 했지만 자주성을 지키고 있었던 우리의 역사가 일본에 의해 국권을 상실하고 강제점령을 당해 온갖 인적, 물적, 정신적 수탈을 당한 것에는 고종을 비롯해 대한제국의 황실이 무능하다는 시각이 절대적이다. 이러한 인식이 지배적으로 퍼져있는 것에는 어쩌면 우리를 하나로 묶는 강력한 장치인 민족주의적 시각으로만 역사에 대한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어서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대한민국의 민족주의는 1910년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국가를 상실해 버리자 조선인들을 하나로 결집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민족을 끌어들여 것에서 탄생되었다. 그런 뒤 민족주의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결집을 위해 순수성과 우월성이라는 장치를 작동시켰다. 특히 우월성이라는 장치는 역사교육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입되는데 말 그대로 ‘우리 민족은 우월한 민족이다.’ 라는 인식을 강조한다.
우리들 중 대부분은 어렸을 때부터 우리의 역사를 배우면서 자랐다. 적어도 나의 부모님의 경우에는 위인전집은 꼭 읽어야 하는 필독도서로 나에게 강조를 하였고 책장에 꽂…
◎ 聖君과 富國强兵을 꿈꾸다.
리스마가 일정부분 작용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고종은 과연 아버지에게 국정을 맡긴 1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멍하니 그의 아버지의 섭정을 지켜만 보고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고종은 아버지에게 정치의 칼을 잠시 내어준 후 유학서적을 탐독하였다. 실제로 고종은 이 기간 동안 소학, 논어, 맹자, 중용 등 을 강독하였다. 특히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이라는 커다란 정치적 격변을 겪은 후 `국조보감`이라는 역대 군왕들의 이야기에서 귀감이 될 만한 사실들을 엮은 책을 별도로 공부한 것으로 보아 선왕들의 경험을 빌리려고 하였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고종이 이 기간 동안 공부를 한 것은 단순히 학문적인 지식을 쌓기 위함이 아니라 국정을 어떻게 운영하고 민심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하는 한 나라의 군주로서 갖춰야 하는 덕목에 대해 배우는 준비기간을 보낸 것이었다. 이는 고종이 민생에 관해 ‘백성들이 선한가 악한가는 그들을 어떻게 인도하고 솔선했느냐에 달려있다.’ 라고 인식하였고 1882년 문벌숭상의 폐단을 타파하는 교지를 내리고 능력과 실력을 겸비한 서얼과 중인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한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고종의 국가와 민생에 대한 인식은 단순히 그의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것이 아니라 친정을 시작하는 시점부터 정책을 통해 본격적으로 분출되기 시작한다. 고종은 철저히 쇄국정책을 펼치며 열강과의 모든 손을 잘랐던 흥선대원군과는 다른 대외노선을 취하며 적극적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한다. 실제로 여러 방면에서 근대화를 추구하였는데 교육기간인 육영공원을 세웠으며 철도, 전화, 전기 등 다양한 방면에서 근대화를 꾀하는 성과를 올렸다.
나는 고종이 각종 개화정책을 펼쳤던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진 군주였다고 한다면 최익현의 상소에 반대를 했을 것이며 친정을 시작하더라도 아버지가 취했던 정책노선을 그대로 유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종은 동도서기라는 큰 틀 아래에서 국가에는 부유함, 백성에게는 편리함, 군대에는 강성함을 목표로 하는 수많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