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세계적 석조문화유산 석굴암
서론
세계적인 석조문화유산이라고 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인정할만한 석조 문화유산이라고 생각된다. 그랬을 때 누구나가 다 그렇겠지만 처음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석굴암이었다. 석굴암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분류된 만큼 가히 세계적인 석조문화유산이라고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으며 그 아름다움은 더욱 눈이 부신다.
물론 석굴암에는 아쉬운 점도 있다. 먼저 들어간다고 해도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유리 안의 석굴암의 모습밖에 보지 못하여 석굴암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볼 수 없다는 것과 일제의 무분별한 뜯어고치기로 인하여 진정한 모습도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석굴암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만약 석굴암이 본모습을 되찾는다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고 가장 아름다운 석조 문화유산이라고 하는 것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석굴암이 조성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서 석굴암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겠다.
본론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보면,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751년(경덕왕 10)에 대상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창할 때, 왕명에 따라 착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그는 현세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는 한편, 전세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는 불교의 인과응보 설화를 기반으로 한 요소가 엿보이는 전설적인 유래이지만, 대상 김문량의 집에 환생하였다는 김대성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타나듯이 경덕왕 때에 중시로 있었던 김문량이 실존인물임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의 아들인 김대정이 신라의 기명 방식에 의해 대성과 동일인물인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김대성은 왕명을 받들어 토함산의 정상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전개하여 불국사와 석굴암이라는 김씨 왕족을 위한 2대 사찰의 건립에 마지막 생애를 다 바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석굴암은 김대성 생…
채 검지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는데, 이는 석가모니가 큰 깨달음을 얻어 모든 악마의 방해와 유혹을 물리친 승리의 순간, 즉 깨달음을 얻은 모습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성도상(成道像)이라고 한다. 그 모든 것이 내면에 깊은 숭고한 마음을 간직하도록 조성된 것으로서 세계에서도 가장 이상적인 미를 대표하고 있다.
게다가 당나라의 현장이 17년간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성지를 순례하고 쓴 풍물지리지 성격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는, `석가모니가 정각을 이룬 바로 그 자리에 대각사(大覺寺)가 세워져 있고, 거기에 정각을 이룬 모습의 불상이 발을 괴어 오른발 위에 얹고, 왼손은 샅 위에 뉘었으며 오른손을 늘어뜨리고 동쪽을 향해 앉아 있었다.
대좌의 높이는 당척 4척2촌이고 넓이는 1장2척5촌이며 상의 높이는 1장1척5촌, 양 무릎 폭이 8척8촌, 어깨 폭이 6척2촌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석굴암의 본존불 크기와 이 기록이 일치하고 있다.
그런데 현장이 보았던 대각사의 그 불상은 현존하지 않고 있어 석굴암의 역사적 가치의 무게를 더해주고 있다.
이것뿐 아니라 석굴암의 본존불은 사각형의 예배공간에 서면 불상의 머리가 뒤에 있는 광배의 정중앙에 오는데. 이것을 계산해보니까 키가 160cm 되는 사람의 눈높이에 맞춘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광배도 원래는 타원의 모습으로 되어 있는데 이 자리에서 보면 동그랗게 보인다고 하는데, 이런 것들을 모두 계산해서 만들었다는 것이니, 당시 신라인들의 용의주도함과 계산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석가모니 대불이 앉아 있는 곳인 둥근 주실 뒷벽 가운데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다 나타나는 십일면관음보살상의 아름다운 자태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머리둘레에 열구의 얼굴이 화려하고 섬세하게 조각되어 눈길을 끄는데,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 표정, 화려하게 전면을 장식한 영락(瓔珞:구슬이나 귀금속을 꿰어 만든 장신구) 장식, 유려하게 흘러내린 천의(天衣), 손가락 발가락의 미묘한 움직임, 왼손은 한송이 연꽃이 꽂혀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