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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구의 역사`
중세기 경에 이탈리아의 루식 필라리스(Rusic Pilaris)라는 유희에서 변한 것이라고도 하고 15~16세기경 프랑스 궁전의 라파움(Lapaum)이라는 놀이가 변하여 탁구가 되었다고 한다.
또 1980년대에 영국에서 고안되었다는 설도 잇고 뉴잉글랜드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뿐만 아니라 헝가리의 “케렌”씨가 저술한 책 가운데는 2천년 전 일본의 公家 (현재의 공무원 신분)에서 깃털로 놀이를 한 것이 탁구의 시초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어떤 학자는 약2천년 전 동양의 각 국에서 예컨대 신라의 화랑들이 즐기던 축국 (蹴鞠)이 그 원형이라는 견해를 비친 일도 있었다.
탁구의 원류에 대해서는 이같이 그 견해가 분분하지만 남아프리카 인도 등 영국 식민지에 살던 영국인들이 더위를 피해 실내에서 놀 수 있는 유희로서 방바닥에 네트를 친 실내경기로 만들었다는 것이 통설이 되고 있다.
국제탁구연맹에서 발간한 편람 (I.T.T.F Hand Book)에서도 고대 중세기 경에 탁구는 테니스, 베드민턴과 구분없이 시작되어 내려오다가 각기 독자적인 형태로 발전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초기에는 그 명칭도 일정하지 않아서 고지마 (Gossima) 위프와프 (Whiff-shaff), 프림프람 등 여러 가지로 불리어졌다. 공은 코르크나 센드페이퍼 그리고 고무공이나 거미줄같이 피륙으로 짠 것 등을 시용 했고 라켓은 나무 또는 마분지 등을 사용했다.
서구의 귀족들이 사교적으로 즐기던 당시의 사진과 그림을 보면 남자는 연미복을, 여자는 이브닝드레스를 착용하는 등 복장도 특이했다.
탁구는 1898년 셀루로이드 공을 사용하게 되면서 그 면모를 일신했다. 당시 영국의 크로스칸트리 주자였던 제임스 깁 (JAMES Gibb)이 미국여행을 하고 돌아오면서 장난감 셀루…
탁구 (Table Tennis)라는 이름도 이때부터 공식명칭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화, 기술개선에 진일보하는 전기를 맞게 된다. 이해 5월 제1회 전조선 경식탁구대회가 개최되어 최근항 선수가 신예로 등장, 돌풍을 일으켰다.
특히 최근항 선수는 1940년 6월 동경에서 열린 범태평양 탁구선수권대회와 이듬해 전 일본 선발탁구대회 그리고 제5회 전 일본 탁구선수권대회를 석권하는 등 발군의 기량으로 한국탁구가 국제무대로 도약하는 전기를 마련함으로써 우리나라 탁구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이와 같이 해방전의 한국탁구는 여명기의 일천한 연륜임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의 뛰어난 자질로 눈부신 활약상을 보임으로써 암울했던 식민지 시절에 민족의 울분을 탁구를 통해 달래 주었다고 하겠다.
1945년 해방을 맞은 그 해 9월 조선탁구협회가 발족, 당시 동덕여고 설립자였던 조동식씨가 초대회장으로 취임했다. 이어 1947년에는 대한탁구협회로 개칭하고 첫 사업으로 제1회 전국종합탁구선수권대회를 개최했다.
또 1950년에는 국제탁구연맹에 가입했고 같은 해 현 아시아탁구연합(ATTU)의 전신인 아시아탁구연맹(ATTF)의 회원국으로 가맹했다.
우리나라 탁구가 국제대회에 처음 출전한 것은 1952년 11월 싱가폴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였고, 1954년 역시 싱가폴에서 개최된 제4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이경호, 위쌍숙 선수가 혼합복식 종목을 석권, 평화배를 차지한 것이 국제대회에서의 첫 우승이다.
세계무대에 첫 선을 보인 것은 1956년 동경에서 열린 제23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이하 세계대회)로서 여자단체 5위, 남자단체 14위의 전적을 거두는데 그쳤다.
한국탁구가 탁구강국으로 부상한 것은 1959년 도르트문트에서의 제 25회 세계대회 여자단체전에서 준우승의 전과를 올리면서부터 이다. 이후부터 정상정복의 가능성을 보여 왔던 한국탁구는 13년 후 마침내 그 숙원을 실현했다.
1973년 4월 59개국이 출전한 제 32회 세계대회에서 여자단체전을 제패하는 일대 개가를 올린 것이다. 우리나라 구기종목 사상 전인미답의 첫 쾌거를 거둬 한국탁구에 화려한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