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장보고와 청해진의 역사와 청해진이 신라의 해상무역에 끼친 영향
1. 서론
예전에 해신이라는 역사드라마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정말로 재미있게 보았던 드라마인데, 역사와는 조금 다르지만 장보고와 정년이 당나라를 거쳐서 신라의 청해진을 세우고 해상무역을 하는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이번에 한국사개관의 강의를 들으면서 주제를 정하게 되었을 때 해신에서 보았던 신라와 장보고의 해상무역에 관하여 조사하고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에 장보고와 청해진의 역사와 청해진이 신라의 해상무역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2. 장보고의 생애와 청해진의 역사
장보고는 궁복, 궁파라고 불리었다. 완동 출신으로서 일찍이 당나라 서주에 건너가 무령군 소장이 되었으나, 신라에서 잡혀온 노비의 비참한 처우에 분개하여 무령군 소장을 사직하고 신라로 귀국하였다. 해적들의 인신매매를 근절시키기 위하여 왕의 허락을 얻어 1만의 군사로 해로의 요충지 청해에 진을 설치하고 가리포에 성책을 쌓아 항만시설을 보수, 전략적 거점을 마련했다. 청해진을 중심으로 한 서남 해안을 장악한 그는 당시에 성행하던 중국의 해적을 소탕하는 한편,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어들어 동방무역의 패권을 잡게 되었다. 청해진은 그 후에 여러 나라의 중계 무역장으로서 서남해로의 요해처의 구실을 하였다.
그는 김우징을 왕위에 올리기 위하여 반란을 계획하였고 민애왕을 죽이고 우징을 왕위에 오르게 하여 감의군사가 되었다. 신무왕이 죽고 문성왕이 즉위하자 진해장군이 되었다. 문성왕2년에는 일본에는 무역사절을 당나라에는 견당매물사를 보내어 삼각무역을 시작하였다.
그 후 그의 딸을 문성왕의 차비로 보내려고 하였으나 군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그의 세력에 두려움을 느낀 조정의 자객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 장보고는 당시에 자신의 미래가 보장되었던 당나라의 무령군 소장이라는 직…
3. 장보고와 청해진이 삼국의 해상무역에 끼친 영향
고, 중국해적을 소탕하면서 황해와 남해의 해상권을 독점하였다. 장보고는 독자적으로 당 및 일본과 무역을 행하여 독자적인 경제기반을 구축함으로서 커다란 해상세력을 구축하였는데, 그 당시의 무역형태로는 선덕왕2년 10월에 사무역이 금지되면서, 장보고는 당나라에는 견당매물사를 보내고, 일본에는 회역사를 보내어 이들로 하여금 무역선이었던 교관선을 인솔하게 하였다. 사무역이 아니었던 무역의 종류로는 한 국가의 최고 통치자가 상대 무역국의 최고 통치자와 교환을 하는 형식의 공무역과 이를 위하여 가는 사신이 몸에 지니고 가는 협대무역의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는데, 교관선의 파견은 이례적인 것 이었다. 또한 이는 신라의 공무역이 장보고의 사무역에 의존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장보고가 자신의 이름을 통해서 사신을 보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견당매물사와 회역사를 보낸 것을 생각한다면, 장보고의 무역은 순수한 사무역적인 것이 아니라 국가 간의 공식적인 것이라는 의미도 부여받았음을 의미한다.
- 장보고는 당나라에 있을 당시부터 신라방의 여러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신라에 들어와서 청해진을 건설하고 당나라, 일본, 통일신라의 해상 무역의 중심이 되면서 그 당시로는 정말로 이례적이었던 당나라에는 견당매물사, 일본에는 회역사를 보내어 청해진만의 해상경제대국을 형성하였다는 것이 정말로 놀랍다. 특히 사무역이 금지된 상태에서 견당매물사와 회역사라는 것을 생각하여, 해상세력을 더욱더 공고히 하였다는 점에서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의 일본은 신라 혹은 청해진과의 무역에 있어서 예전의 관례와는 어긋난다고 하지만, 신라의 선진문물을 받아드리기 위해서는 해상무역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서 장보고는 황해와 남해의 해상권을 독점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용두사미로 끝나버린 장보고에 의해서 회역사와 견당매물사를 포함한 청해진이 붕괴되어 버리면서 신라의 해상 장악력이 유명무실 해졌다는 점이다. 만약 장보고가 암살당하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