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오늘날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형이상학의 자기 이해에 대한 세 가지 고찰
막스 뮐러
1. 글머리에
다음의 생각들은 1984년 10월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에서 개최된 독일 철학회 총회에서 행한 첫 번째 공개 강연의 내용이다. 공개 강연에 이어 독일 철학회의 각 `철학 분과`에서는 `형이상학에 대한 물음`이라는 일반 주제로 네 개의 분과 강연을 가졌으며, 그에 이어 철저한 토론도 가졌다. 네 개의 분과 강연은 다음과 같다. 울리히 호메스(U. Hommes)의 `기쁨은 진리이다. 현대 과학의 형이상학에 대한 도전에 대하여`, 루드거 호네펠더(L. Honnefelder)의 `초월적 또는 초월론적 형이상학의 가능성에 대하여`, 얀 베크만(J. Beckmann)의 `형이상학과 비판`, 그리고 헤르만 베스트호프(H. Westhoff)의 `기독교적 실존 의식 ㅡ 페터 부스트(P. Wust)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서` 등이다. 이 강연들은 결국 형이상학적 사유의 독특함을 정당화하기 위해 시도한 가능한 네 가지의 체계적 모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형이상학적 사유는 개별 과학에 대립되는, 초월론적 방법과 비판주의에 대립되는 형이상학적 사유의 독특함을 대변하고 있다. 마지막의 강연은 `기독교적 철학`에 직면한 형이상학적 사유와 관련된 내용이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기독교적 철학을 `나무로 된 쇠`, 즉 그 자체가 모순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네 개의 분과 강연에 앞서 행한 다음의 나의 강연 내용은 위의 형이상학적 사유와는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
2. 세 가지 형이상학의 자기 이해
`오늘날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하는 다음의 고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형이상학적 사유를 둘러싼 철학 또는 비철학 분야의 반대자들과의 논쟁이 아니다. 형이상학적 사…
(자연 성향으로서의 형이상학이라는) 형이상학적 욕구가 자신의 목표 ㅡ 따라서 학문이 되려는 목표, 즉 `학문으로 대두될 수 있는 모든 미래의 형이상학을 위한 서설` ㅡ 에 도달하기 위해 택한 길은 잘못된 길이었으며, 그 길은 안전하고 확실한 학문적인 인식으로 이끌지 못하고 형이상학을 단지 끝없는 논쟁에 휘말려들게 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길은 ㅡ 칸트에 따르면 ㅡ 서로 상반되는 형이상학의 다원성으로 인해 그저 우리를 혼란스럽게만 만들었을 뿐이다. 칸트에게도 영원히 포기될 수 없는 형이상학은 자신의 새로운 자기 이해에 바탕을 둔 새로운 길이 그에 의하여 놓아져야만 했다. 우리는 이 길을 나중에 간단히 특징지을 것이다.
우리가 형이상학의 자기 이해와 관련하여 논의하게 된 세 번째 사상가는 마틴 하이데거이다. 그는 처음부터 언제나 철학을 형이상학과 동일시하였으며, 일생을 통하여 시종일관 철학을 형이상학으로 이해하였다. 그가 마침내 오늘날 형이상학이 종말에 도달한 것으로 보았을 때, 그것은 그에게 곧 철학의 종말이었다. 철학 또는 형이상학의 이 같은 종말은 완성(끝을 맺음)인가 아니면 끝장(파멸)인가 서양 사람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형이상학이 각인되어 있으며 그래서 형이상학은 서양의 역사로부터 분리해 낼 수 없다. 그렇다면 이 형이상학은 극복되어야할 어떤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그것에 이별을 고하고 잊어버려야 하는가 그러한 잊어버림 속에서 우리는 형이상학을 속시원히 떨쳐 버릴 수 있을까 아니면 프로이트(S. Freud)가 상기시키고 있듯이 잊어버린 것이 하나의 새로운 통제할 수 없는 힘을 얻어 우리에게 덮쳐 오는 것은 아닐까 이로써 우리는 하이데거를 넘어서 하이데거에서 유래된 하이데거 이후의 `현금`(Heute)의 한가운데 서 있는 셈이다. 우리 시대의 형이상학은 자기 이해에 대한 물음은 ㅡ 물론 역사는 되풀이 될 수 없으므로, 이 자기 이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도 아니고 칸트의 그것도 아니며 또 단순히 하이데거의 그것일 수 없지만 ㅡ 만일 형이상학이 실제로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