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북 핵이 통일에 미치는 영향
1. 선군정치로의 전환과 북 핵 개발의 배경
1) 선군정치로의 전환
북한은 1990년대 전후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되는데 대외적으로는 소련의 붕괴와 대내적으로는 식량난으로 대표되는 경제적 위기가 바로 그것이다.
북한 경제의 대표적 문제점인 식량부족은 평야지역이 많지 않고 기후 역시 농업에 맞지 않는 상황에서 집단 농업이라는 구조적으로 생산성 저하의 문제를 안고 있는 체제를 택함으로써 더욱 심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식량난 못지않게 심각했던 문제는 바로 “에너지” 부족 이었다. 1990년대 북한은 석탄 생산량이 계속 감소하였는데 이는 채탄 기술의 후진성과 투자부족에 그 원인을 두고 있으며 이와 아울러 1980년대 중국 소련 등에서 원유를 값싸게 수입해 올수 있었으나 1990년대 들어와 이 국가들이 국제 가격에 맞는 가격 결제를 요구하면서 1991년부터 석유수입이 급감, 1996년에는 원유 수입량이 94만 톤에 불과했는데 이는 1980년대 250-300만 톤 수입에 비하면 반도 되지 않는 수치이다. 북한 산업구조가 에너지 다소비부문에 치중돼 있는 점도 이런 에너지 부족문제를 더욱 부채질 하는 원인이 되었다. 소련의 붕괴와 경제적 위기로 인해 북한 사회 내의 주민 통제력 상실과 공산주의에 사상적 위협을 맞은 김정일과 당 수뇌는 국내로는 혁명적 군인정신의 강조, 국외로는 핵무기 개발로 대표되는 선군정치를 주체사상을 대체하는 사상으로 선택하게 되었다.
2) 북 핵 개발의 배경
선군정치로의 전환하게 된 계기는 1990년대 국내외적 위기에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북 핵 개발의 역사는 이보다 더 오래되었다. 북한은 1950년대부터 직접 조달이 가능한 우라늄을 기반으로 핵무기 개발에 나서서 1993년…
2. 북 핵 협상
1) 제네바 합의
2) 6자회담
비핵지대화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서 해나갈 것” 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 결과 : 결과적으로 제네바 합의를 통해 핵시설을 동결시키는 데에는 성공했다고 보여 졌으나, 북한의 과거 핵개발계획에 대한 투명성을 보장하는 데 실패했으며 2002년 제2차 북 핵 위기가 발생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북한의 핵개발 야망을 완전히 차단하진 못했다. 또한 북미 협상은 북한이 남한과의 대화를 최대한 기피하려는 것을 허용했다고 볼 수 있는데 북한은 남한에 대한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한국을 협상상대로 인정하지 않고 따돌리기를 원했고 이를 북미 회담을 통해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제네바 기본합의서와 부속합의서의 내용을 간추려 보면 미국은 북한에 핵 발전, 에너지, 경제적 외교적 혜택을 모두 제공하고 그 대가로 북한은 핵 프로그램 및 핵 기반 시설의 개발을 중단한다는 것이다. 이는 북측에서 미국과 협상을 함에 있어서 핵무기라는 전략적 무기의 개발이 어떠한 이점을 취할 수 있는가를 절실히 깨닫게 한 회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 6자회담
-배경 : 2002년 10월 미국 제임스 켈리특사의 방북 시 북한의 우라늄 핵폭탄 개발계획이 드러남으로써 북한 핵문제가 새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후 북한의 자주권 인정과 상호불가침 확약, 그리고 미국이 북한의 경제발전에 장애를 조성하지 않는 전제조건으로 미국과 협상하겠다는 입장과 미국의 선 폐기 후 협상의 입장이 고수되면서 긴장국면이 조성되었다. 2002년 11월 15일 KEDO 집행이사회는 12월분부터 대북 중유공급을 중단하였고 북한은 12월 2일 IAEA에 핵사찰 결의안 수용불가 외교서한을 보내 핵사찰 거부 입장을 명확히 하였다. 또한 21일에는 영변 핵시설 일부에 대한 일방적인 봉인해제 및 감시 장비 작동 불능조치에 착수하였다. 이후 도널드 럼즈펠드 미국방부장관의 강력한 대북 경고를 무시하고 북한은 12월 24일 5MWe원자로, 폐연료봉 저장시설, 방사화학실험실등 핵연료봉 제조공장에 북한의 핵 활동 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