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서 론
신중국은 47년의 역정을 걸어왔다. 이 동안 전체적으로 말해 중국은 각 분야에서 거대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가난하고 낙후했던 면모를 왜 바꾸었고, 국제적 지위도 크게 향상됐으며, 인민생활도 현저하게 개선되었다. 이에 따라 중국은 세계의 중요 문제에서 독자적인 발언권을 갖게 되었고, 중국의 참여없이는 원만한 해결을 기대하기 어려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이렇게 된데에는 중국이 개혁개방 이 전부터 세계 문제에 적극적인 자세로 참여해 오고, 냉전 해소 이후 형성된 세계의 다극화 추세에서 더욱 한 몫을 차지하게 된데에도 그 인인이 있으나, 보다 큰 이유는 개 혁개방과 더불어 국력이 나날이 증대하고 있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겠다. 나아가 21세기를 맞이하여 국내총생산(또는 국민총생산)이 곧 미국을 능가하여 전 세계의 첫번째 자리를 차지하게 되리라는 전망이 강력하게 대두되고 있는 중국은 1978 년 12월 이후 개혁개방을 실시한 이래 關년 `64` 천안문 사태로 한때 어려움을 겪긴 했으나 그 외에는 세계가 주시하는 탄탄한 고속 성장을 거듭하고 있으며, 현대화된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건설에 모든 노력을 기우리고 있는 중이다.
여러 서적과 그 시대의 신문기사를 보면 등소평의 영향은 중국에 있어서 상당히 크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인의 마음에 그는 희망이었고 등불과도 같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중국이 개혁개방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고, 개혁개방을 추진해온 이론은 무엇이며, 주로 어떤 방면에서 개혁개땅을 해왔고, 또 그 성과와 미래에 대한 전망은 어떠한가, 그리고 이에 대하여 우리의 대중국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등을 체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본 론
I. 떵샤오핑(鄧小平)
(1)등소평의 집안 내력
본적이 사천성 광안현(廣安縣)인 등소평은 집안도 아주 훌륭한 편이었다. 조상들 …
시민(鄧時敏) 외에 관계에 진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등시민은 진사에 급제한 후에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 편찬을 맡았다. 그 후 시강학사(侍講學士), 통정사부사(通政司副使)를 거쳐 건륭 10년에는 대리사정경에 올랐다가 만년에 고향으로 돌아가 66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아마도 명청 시기를 통털어 등씨 집안에서 관직이 가장 높았던 사람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후로 등씨 집안은 점점 위세를 떨치지 못하고 더욱 기울어갔다.
등소평의 아버지 등소창(鄧紹昌)은 두 명의 소작농을 거느린 소지주였다. 등소창은 일찍이 사천의 비밀단체 `가로회(哥老會)의 단장으로 지방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항상 마을 사람들의 어려움과 근심을 해결해 주곤 하였다. 당시에 사천지역에서 일어난 많은 반청(反淸) 의거는 그곳의 최대 세력이었던 `가로회`가 주동하였으므로, 등소창도 단장의 한사람으로 그 의거에 가담하였을 것이다.
등용의 기록에 의하면, 등소창은 1914년 광안현 단련국장(團練局長)을 역임하였다가 사직한 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향장(鄕長)을 역임하였다고 한다.
등소창은 등씨 집안의 3대 독자였기 때문에 4명의 아내와 결혼하여 9남매를 두었으나 4남 3녀만 살아 남았다. 등소창은 13세 때 첫째 부인 장씨(張氏)와 결혼하였으나 장씨가 병사하여 후손을 보지 못하였다. 15세 때 다시 둘째 부인 담씨(淡氏)와 결혼하였으니, 이 담씨가 바로 등소평의 생모이다. 담씨는 모두 3남 2녀를 낳았는데, 첫째가 장녀 선렬(先烈), 둘째가 장남 선성(先聖, 즉 등소평), 셋째가 차녀 선진(先珍, 10여세 때 병사함), 넷째가 차남 선수(先修, 즉 등간 鄧墾), 다섯째가 삼남 선치(先治, 즉 등촉평 鄧蜀平)이다.
1926년 등소평이 프랑스로 간 뒤 아무런 소식이 없자 담씨는 자식 생각에 세월을 보내다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등소창의 셋째 부인 소씨(蕭氏)는 등씨 집안의 여섯째 사남 등선청(鄧先淸)을 낳은 뒤에 병사하였다. 그 후 등소창은 다시 넷째 부인 하백근(夏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