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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 왕건정권의 연속성에 관한 논거
(왕건이 궁예의 계승자라는 논거)
왕건은 정책면에서는 반궁예라고 역사는 전해지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보면 궁예의 계승자라고 할 수 있다. 분명히 호족정책이라든지 정책면에서의 차별성은 찾아볼 수 있으나 왕건이 궁예를 계승하였다는 역사적 진실 또한 존재한다. 그러한 역사적 진실에 대해서 언급하여 보려고 한다.
-첫째. 국호의 계승
왕건과 궁예는 동일한 국호를 사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왕건은 궁예를 축출하고 국호를 고려라고 하였고 궁예는 처음에 국호를 고려라고 하였다. 분명 궁예는 마진, 태봉이라는 국호를 바꾸기도 하였지만 이러한 국호의 계승은 궁예에 대한 계승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그 시대적 배경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궁예가 국호를 고려라 한 것은 고구려 계승의식을 표명한 것이었다. 그 후 마진과 태봉으로 바꾸긴 하였지만 고구려 계승의식을 포함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마진과 태봉은 포괄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로 고구려 계승의식을 기반으로 한 천하 중심으로서의 대동방국과 천하통일이라는 가치를 내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궁예가 이러한 국호변경을 하게 된 이유를 알아보자면 궁예가 국가를 처음 설립하였을 때 고구려의 고토라고 할 정도의 한강과 임진강의 북쪽의 대부분이 강역에 해당하는 국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국호를 변경할 시기에는 강역이 넓어져서 신라지역의 일부는 물론이…
-둘째, 자주적 연호의 사용
-셋째, 정치체제의 계승
또한 관제 및 관직으로서도 궁예를 계승한 예가 많이 존재하며「고려사」백관지를 보면 왕건이 국초에 태봉의 관제를 그대로 인정하고 운용하였다는 것이다. 즉 고려 초의 관부가 상당수 태봉관제를 답습하였고 실제로 태봉의 광평성은 고려의 최고의 관부라고 할 수 있
승하였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정치체제의 계승
관계 혹은 관등은 관리들의 위서관계를 표현하는 것으로서 국가의 정치체제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궁예정권의 관계를 통해 특성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관계의 계승을 통해 궁예와 왕건의 연속성과 계승을 이야기 할 수 있다. 궁예정권의 관계는 모두 9관등이며 이것은 왕권에게 계승되었으며 예를 들자면 궁예가 설치한 관등 가운데 하나가 정광 원보 대상 원윤 좌윤 정조 보윤 군윤 중윤이다. 이 관계는 고려 초의 9등 관계인 대광 대승 대상 원보 원윤 좌윤 정조 정위 보윤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즉 왕건은 자신이 정권을 장악한 뒤 새로운 제도적 장치를 만든 것이 아니라 종전의 즉 궁예정권의 제도적 장치를 답습하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고려 초의 관계에는 궁예에 의해 제정된 관계명이 많이 발견되었고 태봉의 제도 역시 답습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제도적 측면에서도 궁예와 왕건의 연속성의 논거를 찾을 수 있다.
또한 정치운용에 있어서도 궁예의 왕건 계승은 계승의 논거를 찾을 수 있다. 왕건은 취민유도로 상징되는 일련의 대민정책을 정치의 기본으로 삼았다. 궁예 역시 통치이념을 민중적 기반에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궁예는 이미 자신의 부하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생활을 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하고 있고 또한 궁예의 부하가 650명에서 3,500명으로 불과 2년 만에 급증하였다고 하는 점이다. 즉 궁예는 당시의 골품제의 타파, 백성들의 질곡으로 부터의 해방 등 현실적 과제의 해결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민중과 동고동락하고 부하를 급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대민정책을 정치의 기본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또한 관제 및 관직으로서도 궁예를 계승한 예가 많이 존재하며「고려사」백관지를 보면 왕건이 국초에 태봉의 관제를 그대로 인정하고 운용하였다는 것이다. 즉 고려 초의 관부가 상당수 태봉관제를 답습하였고 실제로 태봉의 광평성은 고려의 최고의 관부라고 할 수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