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영남의 도로의 지리학
(1) 한국의 도로
1) 들어가며
도로가 현대사회에서 사회간접자본으로서 산업과 경제의 발달에 커다란 영향력을 지니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전근대사회에서도 오늘날과 같은 정도는 아니었지만 정보의 전달과 물자의 운송, 사람의 왕래가 대개 도로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물자의 유통이나 정보의 전달은 그 시대의 도로망, 도로율, 도로의 너비 등에 의해 제약받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물자유통이나 정보전달의 필요성이 도로에 관한 제반 사항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과학기술의 본격적인 발전이 있기 전까지는 기술수준의 제약은 도로의 발달을 가로막는 중요한 원인이었다. 한국은 잘 알려져 있듯이 서구처럼 과학혁명이 일어나지도 않았고, 그 결과 19세기말까지 산업혁명이 일어나지도 않았으며, 그 성과가 서구로부터 전달될 일도 거의 없었다. 당연히 도로의 발달은 어느 정도 정체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번 영남지역의 답사를 통하여 한국도로교통의 발달과정을 되짚어보며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가 일찍이 도로교통이 발전하지 못한 원인과, 동시에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온 원인을 알아보고, 과거에서 현재까지의 ‘도로’ 즉, ‘길’이 갖는 의미의 변화 또한 알아보는 기회를 갖고자한다.
2) 도로교통의 발달과정
① 조선시대
조선은 중앙집권국가로서, 한양을 중심으로 한 방사상, 직선형 교통로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도로제도는 역과 역로(驛路)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는데, 역은 공문서의 전달, 관리의 내왕과 숙박, 관물(官物)의 수송 등을 돕는 국가기관이었다. 30리마다 설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고, 역게는 역리역졸노비역마 등과 역의 운영에 필요한 토지가 등급에 따라 할당되었다.
역과 역로는 한성과 지방의 주요 행정중심지 및 군사기지를 잇는 교통통신기관으로 운…
② 일제강점기
③ 해방이후
마다그림 Ⅳ-1-②, 쌀이 수북이 쌓인 일제강점기의 군산항 시멘트기둥의 이정표를 세워 전혀 새로운 도로경관이 출현했고, 우마차(牛馬車)가 화물의 단거리 수송수단으로 널리 보급되었다.
1910년에 우리나라를 강점한 일제는 서울에서 전국으로 뻗어나가는 도로의 기점으로 도로원표(道路元標)를 광화문 네거리의 비각 앞에 세우는 한편 도로를 중요성에 따라 1등도로, 2등도로, 3등도로, 등외도로 등으로 나누고 그 건설에 더욱 힘을 기울였다. 또한 1912~1914년간에는 대구~경주~포항 노선을 시발로 하여 평양~남포, 천안~온양, 김천~상주, 공주~조치원 노선에 버스가 다니기 시작했다.
1920년대 말경까지는 새로운 도로망이 전국을 덮어 식민통치의 기반이 다져졌다. 그리고 새로 낸 신작로의 요지에는 신흥취락이 발달하기 시작하고, 일부 신흥취락은 지방의 행정기능을 넘겨받으면서 점차 도시로 성장했다.
한편, 도로의 정비가 필수불가결의 전제조건이 되었던 시점에서 철도가 놓이기 시작하면서 철도는 다시 도로를 대체했다. 그러므로 도로의 발달은 급속히 이루어질 수 없었고 1930년대에도 도로 사정은 만족할 만큼 좋아질 수는 없었다.
근대화의 길목에서 한국은 상대적으로 상업과 산업의 발달이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제는 1910년대에 육로보다 더 중요한 운송수단이었던 수운에 직접 침투하려던 시도를 하였으나 수로사정에 어두운 것 등으로 인해 그들의 기도가 좌절된 일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일제 침략과 함께 침략의 한 수단 이었던 신작로와 철도는 한국인들이 쥐고 있던 수상운송권을 무력하게 만들었고 수운은 쇠퇴해 갔다. 이로써 철도와 도로는 근대화와 함께 수탈의 상징이 되었다.
③ 해방이후
그림 Ⅳ-1-③, 전국간선도로망계획 광복 당시 남한의 자동차대수는 약 7천대였다. 남한의 도로교통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자동차가 급증하면서 크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이후에는 자동차공업의 발달과 국민의 소득증대로 자동차가 급속히 보급되어 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