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들어가며
김유정은 1908년 1월 11일 본관이 청풍淸風인 아버지 김춘식과 어머니 청송 심씨의 2남6녀 팔남매 중 일곱째로 서울 진골(지금의 종로구 운니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김 육(1580-1658)의 10대손으로 어려서 이웃의 글방에서 천자문, 논어 등을 수학한 것으로 전해진다. 맨 위로 아들이 하나, 그 밑으로 딸만 내리 다섯이나 낳던 끝에 태어난 아들이라 집안 식구들의 관심은 대단했다. 특히 집안에 여자들이 많아 유정은 그네들의 눈길 손길에서 잠시도 놓여날 때가 없었으며, 고향 마을에 내려올 때마다 김 도사댁 손자니 김 참봉댁 도련님 등으로 떠받들어졌다.
작가 김유정의 고향은 강원도 춘천군 신동면 증리(실레마을)로 지금의 경춘선 신남역이 있는 곳이다. 그 마을은 춘천에서 20리 가량 산을 끼고 들어싸인 모양이 떡시루 같다고 해서 실레 마을이라 불렸다. 그 당시 실레 마을은 빈한한 촌가가 50여 채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이었으나, 김유정의 집은 해마다 몇 천 석의 소출을 거둬들이는 대지주로, 그 집 땅을 밟지 않고는 백 리길을 오갈 수 없다고 할 만큼 부자였다. 서울 진골(지금의 종로구 운니동)에도 백여 칸 되는 집을 마련하여 춘천과 서울을 오가며 살았다.
비록 유정이 서울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유력하긴 하지만 그 출생지가 어딘가 하는 것은 아랑곳없이 본인은 자신의 고향을 춘천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정신적 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부모의 고향을 자신의 고향으로 쉽게 받아들이게 마련인데 특히 유정은 춘천이 자신의 정서적 본향이며 문학적 자산 그 자체라고 여기고 있었다.
대지주로 군림하던 할아버지가 죽고, 가족이 서울 집으로 이사하면서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유정의 조실부모는 이후의 평탄치 못한 생활의 서막에 해당한다. 겨우 일곱 …
로 날아드는 화살 같았다고 기록하였다. 그는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그 충격에 사람과 만나는 것을 꺼리고 혐오하는 염인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형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작품 속에서 보였다.
김유정은 형의 보호 아래 서당에 다니며 한문 공부를 했고, 재동 보통학교를 거쳐 휘문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갔다(1923년). 조카 김영수에 의하면 김유정은 학교에 다니면서 바이올린, 하모니카를 연주하고, 스케이트를 배우고, 축구/권투/영화 보기 등을 즐길 만큼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생활했다고 한다. 난봉이 절정에 이른 형은 술과 여자에 빠져 가족들을 들볶고 물건을 부수며 심한 매질까지 해댔지만, 김유정만큼은 제외였다. 그러나 김유정은 우울하기만 한 집안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방황했다. 형마저 거덜 난 재산을 정리하여 실레 마을로 내려가 버리자 김유정은 졸지에 삼촌네를 거쳐 이혼한 둘째 누이 집에 얹혀사는 신세가 되었다. 이혼하고 피복 공장에 다니는 누이 유형의 집에 얹혀사는 신세가 된 유정은 이 무렵(1929년) 疾苦生活도 함께 시작된다. 치질을 앓기 시작한 그는 삼촌이 외과의사로 근무하는 적십자병원에서 수술을 받기도 하였으나 병은 완치되지 않았다. 이후 그에게는 늑막염, 폐결핵 등의 병이 연속적으로 발병했으며 치질과 폐결핵은 그를 절명시킨 병명이기도 하다. 그러한 그에게 사랑이 찾아왔다.
김유정이 자신보다 네 살이나 연상인 명창 박녹주(朴綠珠:1904~1979)를 처음 보게 된 것은 휘문 고보를 졸업하던 해 가을쯤이었다. 목욕탕에서 나오는 박녹주를 보고 그는 한눈에 반해 짝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는 밤새워 편지를 써 보내는가 하면 혈서를 써서 전하기도 하고 선물을 보내기도 했지만 번번이 되돌아오고는 했다. 직접 찾아가 구애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박록주가 나가는 술집 앞에서 밤을 새워 기다렸다가 인력거에 탄 그네를 끌어내려 죽이겠다고 협박했지만 끝내 그의 사랑은 외면당하고 말았다. 이 같은 병적인 짝사랑은 약 2년간 계속되는데 당시의 상황과 정신적 갈등은 그의 자전적 소설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