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우리나라 근대극의 흐름
1. 최초의 서구식 극장과 <은세계>
1920년 12월에 최초로「협률사(協律社)라는 서구식 극장에서〈소춘대 유희(笑春臺游戱)〉라는 연희가 상연되었다.「협률사는 궁내부에 설치되었으니 오늘날 국립 극장격이라 하겠다. 이는 본래 고종 황제의 칭경 예식(稱慶禮式)을 위해 건축된 것이나 콜레라의 유행, 영친왕의 변환 및 흉년이 잇달아 칭경 예식은 계속 연기되었다. 그 동안 여기서 판소리와 광대와 기생들이 각종 연희가 상연되어 풍속을 해친다는 비난의 소리가 높았다. 1906년 4월 이필화의「협률사」폐지 상소문을 계기로「협률사」는 없어지고 만다. 연희 단체로서의「협률사」는 사사로이 존속되었는데, 1906년「원각사」발족 이후에도 그 잔여파들이「협률사」라는 이름으로 가끔 공연을 갖고 나중에는 지방 흥행을 떠나서 1913년경까지 근근히 연명하였다고 한다.
공식적인 「협률사」의 폐지 이유에도 같은 장소(급장)에서 사사로운 영리적 공연이 계속 되다가 1907년 2월 그곳에「관인 구락부(官人俱樂部)」가「협률사」자리에서 남대문쪽으로 이전하고 7월 하순에 이인직(李人稙)이 알선하여 그 자리에서「원각사」(圓覺寺)를 시작하게 된다. 신연극 〈은세계〉는 1908년 11월에「원각사」에서 공연되었다. 이〈은세계〉공연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해서, 그것이 초기 신파극적인 상연이었느냐 혹은 대화창을 조금 넘어선 분창 형태의 초창기형 창극이었느냐는 아직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인직의 관여 없이 구식 광대들이 어떻게 `…
2. 신파극 시대
신파 무대는「원각사」,「광무대」,「단성사」를 미루어 생각하면 매표소와 신발방을 위시하여 무대화 관객성 및 복도와 객석을 통하는 미닫이문 있었다고 전하는데, 이는 일본의 신파극 무대와 그 형태가 유사하다. 무대 배경으로는 한두 폭의 고정된 배경화를 사용한 듯하여 무대 뒤 백포장에 활동사진을 비추기도 했다 한다.
3. 리얼리즘 연극의 태동
의 번안극을 주로 하였으니 군사극, 탐정극, 가정 비극의 그 주류를 이룬다. 공연은 일정한 각본이 없이 대강의 내용과 배역의 성격을 알아 가지고 각자 요령껏 상대방에 응하는 식이었다. 따라서 1910년대에 상연된 수백 개의 레퍼토리 중에서 줄거리나마 전에 오는 것은 20 여 개에 불과하다. 또한 유명한 배우를 중심으로 공연되는 스타 시스템을 가졌으니, 일례로 임성구는 인력거꾼으로 나와도 비단옷을 입었다 한다. 연기도 일본의 가부끼식 연출과 유사한 변사조로 했고, 억양이나 표현은 과장이 심하였다.
신파 무대는「원각사」,「광무대」,「단성사」를 미루어 생각하면 매표소와 신발방을 위시하여 무대화 관객성 및 복도와 객석을 통하는 미닫이문 있었다고 전하는데, 이는 일본의 신파극 무대와 그 형태가 유사하다. 무대 배경으로는 한두 폭의 고정된 배경화를 사용한 듯하여 무대 뒤 백포장에 활동사진을 비추기도 했다 한다.
한편 1910년대에 지상에 발표된 희곡으로는 조일제의 〈병자 3인〉(1912), 이광수 의〈규한〉(1917), 윤백남의〈국경〉과〈운명〉 및 최승만의〈황혼〉(1919) 등이 있다. 이들 중〈병자 3인〉과〈국경〉은 그릇된 남녀 평등 사상이나 가정 개량이 빚어내는 촌극을 그렸다.〈규한〉,〈운명〉,〈황혼〉등은 모두 당시 결혼의 문제점을 극화한 것이다.〈규한〉은 구식 여성의 입장에서〈황혼〉은 신청년의 입장에서 결혼 제도의 모순을 그렸으며,〈운명〉은 사진 결혼의 병폐를 작품화했다.
이들 희곡을 당대 신파극과 비교하여 보면 우선 선사를 갖춘 대본이라는 점이 다르나 극작술이라는 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고 하겠다. 오히려 어떤 신파극은 흥미를 유발시키는 극적 구성의 이들보다 더 나은 작품도 있었다. 그러나 서양 근대극의 그러하듯이 당대의 절실한 사회 문제를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이들 희곡의 근대성은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3. 리얼리즘 연극의 태동
1920 년에의 연극은 대략 세 가지 흐름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가 신파를 탈피하려는 사실주의 연극 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