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서론
1.문화 대혁명의 배경
문화대혁명은 중공에서 1966년 5월부터 76년 10월까지 모택동에 의해 계획, 추진된 대규모적인 상층구조의 이념투쟁 및 권력쟁탈 운동으로 그 배경으로는 1956년경부터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 대중노선과 공업우선 전문가 우선의 노선 간에 뚜렷한 대립이 나타나기 시작 58년부터 대중노선이 추진되었으나 그 위 복잡한 경로를 거쳐 62년 과도기 투쟁이론으로 정식화되기에 이르렀다. 사회주의란 자본주의로부터 공산주의에 이르는 과도기이며 계급투쟁이 존속하고 있다는 생각에 따라 63년부터 농촌의 인민공사에서는 사회주의 교육운동이라는 대중투쟁이 전개되고 중공군 내에서는 마오쩌뚱 사상 학습운동이 예술분야에서는 갖가지 혁신이 때맞춰 일어났다.
본론
문화대혁명을 바라보는 시선
1)정치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문화대혁명
1962년 9월 마오쩌뚱은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의 1)실용주의 노선에 제동을 걸기 위해 좀 더 강력한 계급투쟁을 주창하고 나섰다. 이렇게 시작된 계급투쟁진영과 실용노선진영과의 대립은 1966년 8월 8일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마오쩌뚱이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 안”을 발표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양 진영 간의 힘의 구도를 깨고 다시 정치권 전면에 나서게 된다. 결과적으로 문화대혁명은 사회주의에서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대중운동을 일으키고 그 힘을 빌어 중국공산당 내부의 반대파들을 제거한 일종의 권력투쟁으로 시작된 것…
마오쩌뚱식 독재권력을 파시즘과 나치즘으로 대변되는 극우주의와 공산주의라는 극좌주의를 결합한 독특한 형태의 극권주의라고 할 수 있다. 마오쩌뚱은 문화혁명 기간 동안 3)삼층운동 을 전개하여 개인독재의 극치를 보여주었으며, 4)사구타파운동 을 통해 과거를 청산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를 계기로 고적이나 유물 등이 함부로 파괴되었으며, 지식으로 대변되는 온갖 고서적들도 불에 태워졌다.
은 자신의 혁명노선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사상과 어울리지 않았던 많은 정적들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는데 이들에 대한 표현으로 수정주의자 혹은 수정주의라며 공격했다. 그러나 마오쩌뚱이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던 수정주의가 과연 어떤 의미로 활용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지 않다. 주적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에 따라 여러 곳에 덧붙여 활용되어졌다고 밖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실용주의 노선을 주장하며 일시적이나마 대약진에 제동을 걸고 인민의 안정을 위해 궐기했던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뚱의 허락을 어렵게 얻어내어 1973년 5)덩샤오핑을 권력에 복귀시키는데 성공한다. 새로운 바람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정치와 경제가 모두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이어서 덩샤오핑의 재기는 새로운 정치력을 갈망하는 인민들 사이에서 추종세력을 형성하는데 큰 계기가 되었다.
반대 세력의 성장은 마오쩌뚱에게 강한 압박으로 다가왔으나, 적당한 후계자를 내세우지 못한 채, 1976년 9월 마오쩌뚱이 사망하고 화궈펑이 마오쩌뚱의 추정자였던 4인방을 축출시킴으로써 사실상 문화대혁명을 주도하던 세력은 모두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로서 문화대혁명은 1977년 8월 제11기 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 종결을 선언함으로써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문화대혁명은 인간을 변화시키기 위해 막대한 에너지를 쏟아 넣은,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실패한 혁명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인간의 변화란 2천년을 유지해 온 유가적 사상이 마오쩌뚱 독재체제에 큰 걸림돌이라고 판단하였고, 결국 중국인들의 정서에 깊숙이 뿌리박힌 이 정신을 제거해야만 혁명의 과업과 독재권력의 유지가 실현될 것으로 판단하고 실시한 전대미문의 사상개조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를 위해 동원된 6)국가기구가 와해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문화대혁명이 발발하던 1966년 한 해에만 50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하방되었으며, 일부는 원적을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의식주 전반에 걸쳐 생산성이 최악의 상황으로 저하되었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