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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우스의 유년기와 대학 재학 시절
가우스는 독일의 수학자이며, 관측자이고 대수학과 해석학 그리고 기하학 등 여러 방면에 걸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겨, 19세기 최대의 수학자라고 일컬어진다. 수학에 이른바 수학적 엄밀성과 완전성을 도입하여, 수리물리학(數理物理學)으로 부터 독립된 순수 수학의 길을 개척하여 근대수학을 확립하였다. 한편 물리학, 특히 전자기학(電磁氣學)·천체역학(天體力學)·중력론(重力論)·측지학(測地學) 등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브룬스비크에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빈궁한 가운데 성장하였지만, 일찍부터 뛰어난 소질을 보였기 때문에, 어머니와 숙부의 노력으로 취학할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비록 소년 가우스를 가르치는데 찬성하지 않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희망으로 남편과 싸워 승리를 쟁취하였고 외삼촌 프리드리히는 총명한 조카의 발전을 위해 소년 가우스의 기민한 두뇌를 단련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해주었다. 3살 때 아버지의 계산이 틀린 것을 지적해주고 10세 때 등차급수의 합의 공식을 창안하는 등 신동(神童)으로 알려져 브룬스비크공(公) 페르디난트에게 추천되어, 카롤링 고교를 거쳐 괴팅겐 대학에 진학하였다.
고교시절에 이미 정수론(整數論)이나 최소 제곱법(最小自乘法) 등으로 독자적인 수학적 업적을 올렸는데, 괴팅겐 대학 재학 시절에 정 17각형의 문제에 열중한 것이 수학의 길을 선택하기로 결심한 계기가 되었다. 사실 가우스는 언어학에도 큰 관심이 있었고 다분한 소질이 있었기 때문에 수학과 언어학 사이에서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가우스가 수학을 택하게 된 것은 수학의 발전에 있어 큰 행운이라 할 …
7년 3월 19일자로 적혀 있는 것은 가우스가 이미 어떤 종류의 타원함수가 이중주기성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그때 그는 아직 20세도 못되었다. 또 뒤에 적혀진 것에 의하면 가우스가 일반적으로 이중 주기성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 더욱 명백하다. 이 발견 하나만 하더라도 만일 공표되었더라면 그를 유명하게 하는데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끝내 발표하지 않았다.
어째서 가우스는 자기가 발견한 위대한 업적을 발표하는 것을 주저했을까? 가우스는 스스로 해명하기를, “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충격에 자극되어 과학적인 일에 종사하고 있을 뿐이지, 다른 사람에게 소용이 되기 위해서 발표한다든지 안한다든지 하는 일은 전혀 관심없다”고 얘기했다. 또 가우스가 일찍이 한 친구에게 얘기한 말은 그의 일기와 발표가 늦춰진 데 관해서 그 둘을 동시에 설명해준다. 그에 의하면, 그가 아직 20세가 되기 전에 새로운 관념의 커다란 무리가 그의 마음을 덮쳐 그는 그것을 거의 제어할 수가 없어서 그것들을 작은 단편에 기록할 시간밖에 가질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일기는 수 주간 걸려서 공들인 연구의 결과를 마지막에 간단한 서술로써 적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청년시대에 아르키메데스나 뉴턴이 각자의 영감에 근거해서 만들어낸 긴밀히 결합된 종합적 증명의 연쇄를 바라보면서, 가우스 자신도 역시 그들처럼 전체를 상하지 않게 하고 어떤 것도 더하거나 빼거나 할 수 없는 완전한 예술적 작품만을 죽은 후에 남기려고 결심했던 것이다. 그 작품은 조금도 갈고닦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완전?단순 그리고 확실한 모습을 이루어야만 했다. 그는 말했다. “대성당은 최후의 비계목을 떼내지 않고서는 대성당이 될 수 없다.”항상 이러한 이상을 눈앞에 그리면서 가우스는 많은 걸작의 개략만 발표하는 안이한 방법보다도 오히려 한 걸작을 몇 번이라도 광택을 내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의 인장에는 몇 개의 열매가 달린 한 그루의 나무가 그려져 있고 , ‘수는 적지만 익었도다(Pau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