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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악플), 타인의 고통
24시간이 채 지나기 전, 인터넷과 TV등 수없이 많은 매체에서는 현 시대의 비극을 알린다. 1분 1초가 다투어지는 그 현장을 우리는 감자 칩을 먹으며 가슴 아파하고, 피를 낭자하게 흘리는 반 나체의 여성을 보며 저녁 식사의 귀중함을 새삼 느끼며 안도한다.
세계가 아닌 우리의 가까운 곳에서도 살인, 강간, 폭행, 납치 등이 벌어지고 있다. 또 이를 다분하게 주관이 반영된 수 천장의 프레임을 보고 우리는 10초간 탄식을 하며 5초간 동정을 하고 단 1초 후에 본래의 삶의 목적을 되짚게 된다.
이렇게 우리가 당연하듯 받아들이는 이러한 반응의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다. 이유는 간단하다. 어차피 이것은 나의 고통이 아닌, 남의 고통, 즉 타인의 고통일 뿐이다. 흔히 하는 말로 강 건너 불구경인 것이다. 불을 차단할 수 있는 강이라는 것이 내 앞에 존재함에 내 안전은 보장되어 있음으로 인해 안도하며, 그 귀신처럼 빨간 혀를 내두르는 고통의 춤사위에 넋을 놓아버리고, 뛰는 가슴을 더욱 요동치게 내버려둔다. 그리고 심지어 그것은 하나의 경험담, 무용담이 되어 자신의 기억에 남을 뿐이다.
전쟁의 참혹성과 고통을 다루는 사진이나 전시회를 접할 때는 우리는 그것을 최대한 객관적인 눈으로 보되 스스로가 갖추어야할 감정과 표출해야할 감정의 중앙분리선 위에 서며 시기적절한 행태를 보이게 된다. 예를 들어 퓰리쳐 상을 수상하고 자살을 선택한 케빈카터의 사진을 보고 우리는 그 사진이 지닌 구도와 피사체의 강렬한 이미지에 ‘슬픔’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듯 말이다.
전쟁 후의 참혹한 현장 속의 울부짖는 아이, 온 몸이 찢어져나간 병사들의 모습, 포탄의 잿더미에 깔려 있음에도 끝까지 아이를 안고 사망한 어머니의 모습에서 우리는 메시지를 원한다는 …
참고 도서 : 수잔 손택 타인의 고통(Regarding the pain of others) 이후 2003
어떻게 받아들여야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 솟아난다. 또한 상처를 상대에게 죄책감 없이 행하는 그것을 멈추게 하기 위해 가져야 할 자세는 무엇인가 궁금하게 된다. 그것에 대한 답으로 수잔 손택의 말 중에 빌려보고자 한다.
(고통을 겪은 그들이 말해준다해도) ‘우리’, 즉 그들이 겪어 왔던 일들을 전혀 겪어본적이 없는 ‘우리’ 모두는 이해하지 못한다. (중략) 정말이지 우리는 그들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우리는 전쟁이 얼마나 끔찍하며,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그런 상황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리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한 장의 사진(심지어 조작도 수없이 되었던)을 보고 판단하고, 공감하고, 이해하고, 슬퍼하려는 거 자체가 그것을 보고 있는 ‘우리’일 뿐이고, 전쟁 등의 악몽을 꾸는 ‘타인’과 별개인 ‘우리’인 것이다. 똑같이 빨간 색의 피를 흘리는 그것을 우리는 상상한다 말하지 말고, 슬퍼한다 말하지 말아야 함이 어쩌면 옳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상대를 모두 이해하듯 비난하며, 쾌락을 느끼는 그 자체에서 어느 한 시점에 스스로가 무너져 갔을 때 타인의 고통을 그때서야 알겠다라는 그런 후회와 깨우침은 거짓이라 말하고 싶다. 그 순간은 오로지 ‘나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사진을 박는 것. 키보드를 치는 것. 전시회에서 감상하는 것. 온라인에서 비난하는 것. 고상한 살인과 언론자유란 권리의 곡해. 우리는 너무도 많은 것을 모르고 있음을 모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제든 우리에겐 ‘그 타인’이 될 무시무시한 상황이 곁에 존재한다.
참고 도서 : 수잔 손택 타인의 고통(Regarding the pain of others) 이후 2003
강준만 세계문화사전 인물과사상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