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설명
중국 근 현대사의 인물(서태후, 장제스, 쑨원, 마오쩌둥)을 알아보고 중국사에 미친 영향력과 역사적 평가
- 미리보기를 참고 바랍니다.
본문/내용
꽃과 칼날의 여인 ‘서태후’
서 론
발표 주제를 정하고자 자료를 모으고 있던 중에 중국의 여자 권력자들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중국은 대체로 남존 여비 사상이 뿌리 깊은 것은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며, 중국의 역사 기록에서의 여자들은 고작해야 황제를 미혹하여 나라를 망치는 역할이 대부분 이었습니다. 이런 중국의 여자에 대한 부정적인 관념들을 등에지고 그녀들은 어떻게 여자로써 최대 권력을 거머쥐고 넓은 중국대륙을 호령하였으며 수많은 군중을 다스릴 수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그 여인들 중 근현대사와 관련된 이번 발표와 관련하여 가장 적합한 사람은 서태후(西太后,1835~1908)라는 생각이 들어 그녀를 발표 주제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발표 준비를 통하여 서태후가 단지 여성으로서 절대 권력을 휘어잡아 그녀가 유명하게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그녀의 탁월한 정치적 감각과 냉철한 이성, 넘치는 카리스마로서 뭍사람들에 게 한편으로는 두려움의 존재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경외의 대상으로서 스스로를 자리 잡게 하였고, 종국에는 방대한 중국의 실질적인 최상위 권력자로서 군림하도록 했습니다.
그렇다면 스스로를 천자의 나라라 칭하며 세상의 중심에 있는 민족이라 자부하던 중국 역사에서, 또한 남성의 권리에 비해 여성의 권리는 미미하던 그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그녀는 어떻게 최고의 권력을 손에 쥐었고, 그 당시 중국의 역사에는 어떠한 영향을 주었을까요? 또한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녀가 그 당시 보수의 중심에 자리하면서 시대변화를 무시한 채 전혀 개혁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을까요?
서태후의 삶과 그녀의 삶이 중국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으며, 그녀의 권력자로서의 면모와 그녀의 개혁을 향한 노력들은 어떠했는지 리포트를 준비하면서 모아온 자료들을 바탕으로 기술해 보았습니다.
본 론
1.서태후(西太后, 1835~1908년)의 출생 및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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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도 미스테리에 싸여 있다. 일반적으로는 병으로 죽었다는 설, 서태후의 강요로 자살했다는 설, 서태후가 독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1886년 서태후는 영·프연합군에 의해 불탄 청의원(지금의 이화원)을 재건하고, 그 이듬해에 "수렴청정"을 "훈정(訓政)"으로 고쳤다.
1889년 명분상으로는 광서황제3)에게 정권을 돌려주었으나 실제로는 내정과 외교의 대권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일전쟁에서 패한 후 일본과 치욕적인 <시모노세키조약>4)을 체결하였다.
1898년 광서황제는 무술변법5)을 시행하였다. 그는 유신파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권을 장악하려 하다가 서태후와 갈등을 빚었다. 이에 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는 9월 21일 정변을 일으켜 광서황제를 영대에 유폐시키고 담사동 등 유신파 핵심인물 6명을 처형한 후 다시 모든 권력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다.
서태후는 새로운 훈정을 선포하고 광서황제의 폐위를 준비하였으나, 지방의 총독과 외국 사신들의 반대로 광서황제의 칭호만 남겨둔 채 단왕 재의의 아들 부준을 황태자로 삼았다.
1900년 8월 8개국 연합군이 북경을 침공했을 때 그녀는 광서황제를 데리고 서안으로
피신하였다가 1901년 9월 굴욕적인 <신축조약>6)을 체결하였다.
1902년 1월 서태후는 광서황제를 데리고 북경으로 돌아와서 다시 그를 영대에 구금하였다.
1908년 10월 13일 그녀는 74세 생일을 기하여 큰 연회를 베풀었다. 그녀는 여러 날 동안 과식하여 5일째 되던 날 이질이 발병하였다. 아편을 평소 보다 배로 복용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고 그녀를 더욱 여위게 만들뿐이었다.
20일 부의7)를 후계자로 세운 다음 날 광서황제가 세상을 떠났다.
1908년 10월 23일 정오에 서태후는 점심 식사를 받고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 의자에 쓰러졌다.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나서 대신들에게, "이후로 아녀자가 정사에 간여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반드시 엄격한 제한을 두어 각별히 대비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