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차례
한·미 용산 미군기지 이전 협상
- 허울뿐인 자주외교 아래 나약한 협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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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Ⅱ. 협상의 배경
Ⅲ. 협상의 과정과 문제점
Ⅳ. 협상 이후 기지 이전 현황
Ⅴ. 협상의 분석
Ⅵ. 일본의 기지 이전 협상 사례
Ⅶ. 맺음말
Ⅰ. 머리말
1950년대의 한국전쟁 이후로 지금까지 한국과 미국은 동맹국으로서 한미연합방위체제를 지속해오고 있다. 한미 양국은 냉전의 시대를 지나 세계평화와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안전을 위한 동맹관계뿐 아니라, 한국과 북한이 세계 유일무이한 분단국으로서 휴전선을 두고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동맹군으로서의 신뢰를 더욱 굳건히 다져오고 있다. 이러한 동맹군의 역할로서 미군은 50년이 넘도록 한국의 수도인 서울의 용산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한국정부는 도심발전과 민족자존의 상징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용산 미군기지를 평택지역으로 이전하는 협상을 미국에 제의하게 되었다.
1989년부터 협상...
본문/내용
한·미 용산 미군기지 이전 협상
- 허울뿐인 자주외교 아래 나약한 협상력
- 목 차 -
Ⅰ. 머리말
Ⅱ. 협상의 배경
Ⅲ. 협상의 과정과 문제점
Ⅳ. 협상 이후 기지 이전 현황
Ⅴ. 협상의 분석
Ⅵ. 일본의 기지 이전 협상 사례
Ⅶ. 맺음말
Ⅰ. 머리말
1950년대의 한국전쟁 이후로 지금까지 한국과 미국은 동맹국으로서 한미연합방위체제를 지속해오고 있다. 한미 양국은 냉전의 시대를 지나 세계평화와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안전을 위한 동맹관계뿐 아니라, 한국과 북한이 세계 유일무이한 분단국으로서 휴전선을 두고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동맹군으로서의 신뢰를 더욱 굳건히 다져오고 있다. 이러한 동맹군의 역할로서 미군은 50년이 넘도록 한국의 수도인 서울의 용산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한국정부는 도심발전과 민족자존의 상징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용산 미군기지를 평택지역으로 이전하는 협상을 미국에 제의하게 되었다.
1989년부터 협상을 시작하여 중간에 유보과정을 거쳐 수차례의 협상 끝에 2004년 10월에는 용산 기지 이전에 대한 최종 합의를 마쳤다. 그러나 협상 과정에서부터 시작하여 최종 합의를 마친 후에도 …
에 대한 합의부터 1993년 기지 이전계획 유보까지
88년부터 용산기지 이전에 대한 한미 양국 간의 합의가 있어왔고, 1990년 6월 25일 이상훈 국방부장관과 루이스 메네트레이 주한미군사령관은 용산 미군기지 이전과 관련한 한미 양국의 합의각서(M0A)와 양해각서(MOU)3)에 서명하였다. 이 각서들에는 한국이 용산 미군기지 이전비용을 전액 부담하고, 모든 건물을 미국 기준에 맞춰 건설, 이전 과정에서 생긴 손실은 한국이 보상, 미군 가족 및 고용인들의 이사 비용도 한국이 부담한다는 불평등한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4) 이에 한국 정부에서는 국가의 막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조약은 국회의 동의가 필요하나 그렇지 않았다는 점에서 위헌의 소지가 있음이 제기되었고, 국방부 장관 권한 범위를 벗어난 중대한 내용들이 각서들에 포함되었고, 실제 부담 경비가 더 커질 수 있음이 지적되었다. 이에 1991년 5월 13일 Fogleman 주한미군 부사령관은 외무부를 방문해 90년 각서에 대해 법적효력이 없어 무효라는 주장에 청와대에 공식 항의하겠다며 각서의 합법성 인정을 강요했다.5) 그리하여 일주일 뒤인 91년 5월 20일 SOFA합동위원회에서 반기문 외무부 미주국장과 Fogleman 주한미군 부사령관이 법적효과를 확인하고 서명하였다. 이후 문민정부 출범 이후 막대한 이전비용 등을 감안하여 용산기지 이전계획은 전면 유보하게 되었고, 2001년 말에야 다시 용산기지 이전의 재추진을 합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평등하게 맺어진 합의각서(M0A)와 양해각서(MOU)는 “잘못 꿰어진 단추”로서 이후 한국 측이 미국과 동등하게 협상하기 어려운 족쇄로 작용하게 되었다.
2. 협상 2기 : 2001년 협상재개에서 2004년 최종합의까지
2001년 12월 한미 국방당국은 제1차 고위 정책회의에서 용산기지 이전을 재추진키로 합의하였다. 당시 용산기지 미군숙소 건설문제가 국내에서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미군기지 이전사업의 추진여부가 다시 재검토 되었고 한미 양국은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