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철학 및 교육사-조선시대 사상가- (이수광, 이익, 유형원, 홍대용, 이덕무, 정약용)
이수광(1563~1628)
1585년(선조 18) 별시문과에 급제, 승문원부정자가 되었으며, 전적을 거쳐 호조와 병조의 좌랑 겸 지제교(知製敎)를 지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방어사 조경(趙儆)의 종사관으로 종군했고, 북도선유어사(北道宣諭御史)가 되어 함경도 지방에서 이반한 민심을 돌이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607년 홍주목사로 부임했다.
1609년(광해군 1) 중앙으로 와서 도승지·예조참판·대사헌·대사간 등을 지냈다.
1611년 왕세자의 관복(冠服)을 청하는 사절의 일원으로 3번째 명나라에 다녀왔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도승지로 관직에 복귀했다.
1625년 대사헌으로서 왕의 구언(求言)에 응하여 12조목에 걸친 〈조진무실차자 條陳懋實箚子〉를 올려 당시 가장 뛰어난 소장(疏章)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여 강화로 갔다.
저서
〈조진무실차자〉
정치의 효과를 이루지 못하고 사회가 어지러워지는 것은 모두 부실한 병 때문이라 지적하였고, 모든 일을 처리하는 관건은 성(誠)에 있으며 성이 곧 실(實)임을 밝히고,
실심으로 실정(實政)을 행하고 실공(實功)으로 실효를 거둘 것을 주장하면서, 생각마다 모두 실하고 일마다 실할 것을 요구하는 무실(懋實)을 강조하였다.
<지봉유설>
가운데 유도부(儒道部)에서, 학문·심학(心學)·과욕(寡慾)·초학(初學)·격언의 5항목으로 분류하고 있는 사실도 주자학에서 존중되는 도체(道體)의 문제나 성리학적 과제를 젖혀두고, 심성의 수양론적 관심 속에서 유학을 분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저술
<지봉집> 31권, 부록 3권
<찬록군서(纂錄群書> 25권이 있다고는 하나 확실하지 않다
유형원(1622~1673)
1636년 병자호란 이후 지평, 여주 등…(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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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응시하였다가 낙방하였다.
1706년 형 잠(潛)이 장희빈(張禧嬪)을 두둔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당쟁의 제물로 장살(杖殺)되자 벼슬할 뜻을 버리고
첨성리로 낙향하여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1763년(영조 39) 83세 때 조정에서 노인을 우대하는 예에 따라 첨지중추부사의 자급(資級)을 내렸으나 그 해 세상을 떠났다. 후에 이조판서에 추증 되었다.
저서
《성호사설》,《곽우록》 ,《성호선생문집(星湖先生文集)》,《이선생예설(李先生禮說)》,《사서삼경》,《근사록(近史錄)》 등
편저
《사칠신편(四七新編)》,《상위전후록(喪威前後錄)》,《자복편(自卜編)》 ,《관물편(觀物編)》, 《백언해(百諺解)》 등
<이익의 학문>
성리학(性理學)에서 출발하였으나 차차 경직화된 학풍에서 벗어나 사회실정에 맞는 실용적인 학문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율곡 이이(李珥)와 반계 유형원(柳馨遠)의 학문에 심취하였고, 특히 유형원의 학풍을 계승하여 천문 · 지리 · 율산(律算) · 의학(醫學)에 이르기까지 능통하였다.
이러한 관심분야는 한문으로 번역된 서학서(西學書)들을 접하면서 더욱 영역이 확대되고 깊이가 심화되었다.
홍대용(1731~1783년)
1766년 중국에 가서 천문·지리·역사 등에 관한
지식을 쌓고 서양 문물을 배우고 돌아왔다
저서
<유포문답> : 천주교와 천문학의 이론을 기록
당시 독일계 선교사로 중국의 흠천감 정(欽天監正)인 유송령(劉松齡, August von Hallerstein)과 부정(副正)인 포우관(鮑友管, Anton Gogeisl)을 만나 필담을 통하여 천주교와 천문학의 이모저모를 기록한 내용으로, 서양 문물에 관한 가장 상세한 기록이다.
<의산문답> : 자신의 과학 사상 기록
의무려산(醫巫閭山)에 숨어 사는 실옹(實翁)과 조선의 학자 허자(虛子) 사이에 대화체로 쓰인 이 글은 그가 북경 방문길에 들른 의무려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홍대용의 자연사상
:상대주의의 입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