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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 본다 -세종
파랑새에서 밥을 먹고 만원을 꺼내 계산을 하였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만원에 있는 세종대왕은 어떤 사람이 길래 우리나라 지폐에 있는 걸까?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을 포함하여 이 지역의 이름(세종 특별자치시)이고 여러 분야에 영향을 끼친 세종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다.
세종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책을 빌리기로 하였다. 하지만 도서관 공사로 인하여 책을 빌릴 수 없었다. 그래서 각자 집 근처의 도서관에서 책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교수님께서 추천해주신 책들 중 몇 권은 집 근처 도서관에서 구하기 힘든 책들이었다. 결국 몇 권만 빌리고 다른 책들을 참고하여 어렵게 자료를 구하여 조사하였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듯이 세종은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다. 충녕대군은 1397년 4월 10일 태종 이방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충녕대군은 본래 세자가 아니였다. 첫째 형인 양녕대군이 본래 세자로 책봉되어 있었다. 하지만 양녕대군은 왕이 되는 것보다는 다른 것에 더 관심이 많았다. 양녕대군은 학문에 관심이 적었다. 그는 놀기를 좋아했는데, 스물 세 살이던 그 무렵엔 매를 한 마리 구해와 거기에 마음을 빼앗겼다. 당시 필선(弼善, 세자시강원의 정4품 학관)으로 있던 정초 등이 양녕대군에게 매를 내보낼 것을 청하자, 양녕대군은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그저 작은 물건일 뿐이다. 내가 이것을 가지고 말을 달려 사냥을 가는…
또한 충녕대군은 여러 분야의 학문에도 관심을 가졌다. 충녕대군은 정치, 경제, 군사, 병법, 역사, 철학 같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학문에서부터 농업, 기술, 천문, 지리, 의학, 음악, 언어학에 이르기까지 갈수록 넓어졌다. 그 학문의 깊이가 전문 학자 뺨칠 정도였다.
세종은 역사편찬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1424년 8월 11일에 윤회가
대마도 정벌 길에 올라 대마도를 공격했다. 이후 이종무는 6월 19일에 정벌을 시작하여 7월 3일에 회군하였다.4) 세종은 태종이 주도한 대마도정벌을 구경꾼처럼 지켜봐야 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종은 나름대로 자기 목소리를 내며 그 밖의 나랏일을 보살폈다.
세종은 1420년 3월에는 집현전을 확대, 개편하였다. 집현전은 단순한 학문적 사업만을 위한 기관이 아니라 인재의 양성과 새로운 문화의 정착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 세종은 명나라와의 사대관계를 원만히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인재의 양성과 학문의 진흥, 그리고 이를 지속하기 위한 정책적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에 따라 집현전은 젊고 유망한 학자들이 채용되었고, 그들에게는 여러 가지 특전이 주어졌다.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생활비를 지원하는가 하면 집현전에 소속된 관원은 경영관, 서연관, 시관, 사관 등의 직책을 겸하였고, 중국의 옛 제도를 연구하거나 각종 편찬 사업에 동원되기도 했다. 세종은 이들 관원 중에 학술에만 몸담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다른 관직에 이직시키지 않고 집현전에만 10년 또는 20년씩 머물도록 해주었다.5) 지금 이 시대에도 집현전과 같이 여러 분야에 뛰어난 인재를 발굴해 낼 수 있는 기관이 필요하다. 단지 하나의 전문지식을 가르치는 곳이 아닌 여러 분야를 고루 배우고 익힐 수 있는 그런 교육기관이 필요하다.
세종은 또한 여러 사람이 책을 볼 수 있도록 인쇄기술에도 관심을 가졌다. 1421년 세종은 이천을 불러 금속 활자를 개량하라고 지시했다. 이천은 장영실을 비롯한 과학 기술 관료들을 불러 활자를 개량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마침내 1420년 경자자, 1434년에 갑인자라는 활자를 만들었다. 갑인자는 아주 정교하면서 아름다운 활자였다. 글자 크기가 똑같아 줄이 잘 맞고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리고 한번 짠 활판으로 인쇄할 수 있는 양도 늘었다. 그리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쉽게 책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세종은 역사편찬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1424년 8월 11일에 윤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