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호남학
조선시대 호남의 실학자
-차례
1. 규남 하백원
2. 존재 위백규
3. 여암 신경준
4. 이재 황윤석
5. 해금 오달운
규남 하백원(河百源)
출생 ~ 사망 : 1781년 ~ 1844년
자 : 치행(穉行), 효일(孝一)
호 : 규남(圭南)
본관 : 진주(晉州)
-생애
하백원은 조선후기의 실학자이다. 순창의 신경준(申景濬), 장흥의 위백규(魏伯珪), 고창의 황윤석(黃胤錫)과 함께 호남의 4대 실학가로 꼽힌다. 본관은 진주이며, 자는 치행이고, 호는 규남이다. 하백원은 1781년 전라도 화순에서 진성(鎭星)과 장택고씨(長澤高氏)사이에서 태어났다. 하백원은 송환기1)의 문인이며 1808년 송환기가 성현을 모독하였다는 죄목으로 삭직되자 그를 변백하여 벼슬을 회복시켰다. 1803년(순조 3) 그는 진사과에 합격하였지만 대과를 보아 관직에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천문·지리·산수 등 실용적 학문에 주력하였다.
이후 백성의 생활을 편안히 하기위해 발명에 힘써 자동양수기인 자승거를 발명하였으며, 펌프의 원리를 이용한 항흡기, 짐을 실어 나르는 목우, 잔을 가득 채우면 저절로 새나가는 계영배, 저절로 시간을 알리는 자명종 등을 만들었다. 이어 1811년에는 동국지도를 완성하였는데 이는 김정호2)의 대동여지도보다 50년이나 앞선 것 이었다. 특히 계영배는 고대 중국에서 과욕을 경계하기 위해 하늘에 정성을 드리며 비밀리에 만들어졌던 `의기`(儀器)에서 …
-학문적 성향
-동국지도(東國地圖)
존재 위백규(魏伯珪)
출생-사망 1727 ~ 1798
본관 장흥(長興)
자: 자화(子華)
호: 존재(存齋)
출생-사망: 1727년 ~ 1798년
-생애 및 사상
알 수 있게 하였다. 즉 이에 의하면 정확한 지도 작성을 위해 백리척(百里尺)을 사용했다는 점, 각 도를 이으면 전도가 되도록 같은 축적으로 그렸다는 점, 평지와 지형이 험준한 곳은 축적의 비를 다르게 했다는 점, 도별(道別), 성읍(城邑)을 다른 색으로 구분하였고, 수륙의 도로, 좌우도의 경계, 봉수(烽燧)와 역 등을 식별하였다는 것을 밝혔다.
이 지도의 가장 큰 특징은 지도에 축척을 표시하여 실제 거리를 계산할 수 있도록 한 점이다. 즉 100리를 1자로, 10리를 1치(寸)로 표시하고, 산지나 계곡 등 굴곡이 있는 지형에서는 1자를 120리 또는 130리로 적용하였다. 또한 제척(梯尺)을 세로로 그리고 백리척이라 표시했는데, 제척의 실제 거리는 9.5cm이므로 100리를 9.5cm로 표시한 것이다. 또한 도별로 채색을 달리하여 식별하였으며, 산과 하천, 도로, 경계, 봉화, 역 등도 색을 달리하여 시각적으로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지도는 조선 후기 대축척 지도 발달에 획기적인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당시로서는 가장 정확한 지도였다. 이 지도를 본 영조는 감탄과 함께 홍문관과 비변사에 비치하도록 했으며, 신경준, 이익3) 등 당시의 여러 실학자들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존재 위백규(魏伯珪)
출생-사망 1727 ~ 1798
본관 장흥(長興)
자: 자화(子華)
호: 존재(存齋)
출생-사망: 1727년 ~ 1798년
-생애 및 사상
존재 위백규는 장흥군 관산면 방촌리 출생이다. 장흥위씨의 본향인 방촌은 반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벽항. 어려서부터 남달리 명민하였던 그는 이미 10세에 천문,지리 등을 열람하는 열성을 보였고 14세 부터는 독서는 물론 기예에도 남다른 특기를 나타났다.
그러나 벽항에서의 궁핍한 환경은 학문적으로 청년기를 맞은 위백규에게 있어 결코 달가운 것이 못되었다. 청년기의 존재는 멀리 충청도 덕산의 윤봉구(尹鳳九,1681~1767)4) 문하에 들면서 본격적으로 학문을 하게 된다. 당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