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한국역사 - 조선시대 양반의 삶과 평민의 삶
Ⅰ.서론
우리는 중, 고등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역사를 배운다. 그러나 과연 역사란 무엇일까라고 생각을 해 본 것은 최근의 일이다. 우리는 왜 역사를 배울까? 역사는 단지 과거의 사실 중에서 중요한 사건의 단순한 나열만은 결코 아닐 것이다. 역사는 불가피하게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바라보게 되고, 이러한 사실은 역사가 현재 사회의 이데올로기의 범주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원인이 된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했듯이 역사라는 것은 단순한 사실의 열거가 아니라 과거의 많은 흔적과 사실들 중에서 역사가의 사상과 이념을 바탕으로 하여 재구성한 산물이기 때문이다. 흔히 잘 알려져 있는 과거 영남출신의 대통령시기 때 신라의 역사를 매우 중요시한 것도 이러한 예일 것이다. 다시 말해 역사는 현 사회이념의 궁극적 목적인 현 사회의 정당성과 정체성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민중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현 사회가 대중의 역할을 중요시하는 사회가 되었음을 역으로 반증하는 사실이다. 정말로 현재의 민중은 민주주의 이념 아래서 과거에 비해 크게 지위가 상승되었으며, 문화에서는 대중문화, 정치에서는 유권자, 경제부분에서는 대량생산의 생산자로서 소비자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와 같이 중요해진 민중의 정체성을 위해 필자는 조선시대의 민중의 삶을 재구성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조선시대는 철저한 신분제 사회이기 때문에 민중의 삶은 지배계층이었던 양반층의 삶의 비교를 통해서야 비로소 정확히 알게된다. 이제부터 두 계층의 삶을 비교를 통해 민중의 역사를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Ⅱ.양반의 삶
조선시대가 신분제 사회였던 만큼 당시의 교육내용과 체제는 민주사회의 구현을 목적으로 하는 현재와 질적으로 달랐다. 무엇보다 교육 대상의…
Ⅲ.일반평민의 삶
그러나 민중은 지배계층
도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가난한 양인 농민층이었다. 반지원은 면천군수로 재직할 당시 그곳 양인농민층의 일반적인 생활상을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라고 하는 글에서 묘사하고 있다. 이 글에서 그는 5명 정도의 노동력과 소 1마리를 가지고 논과 밭 모두 합쳐 약 1결 2부(약 50마지)정도를 경작하는 양인 소작농민을 예로 들고 있는데, 과중한 지대와 조세 부담 때문에 이 농가는 만성적인 적자상태에 벗어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즉 이 정도의 토지에서 연간 피곡 497두를 생산하는데, 지대 250여두와 전세 72두를 납부하고 49두 7승을 종자용으로 남겨둘 경우, 이 농가가 1년 동안 사용할 곡식은 128두 정도, 쌀로 계산하면 3석 4두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게다가 군역?환곡과 같은 각종 부세와 땔감?의복?소금과 같은 생활필수품을 여기에서 충당해야 했으므로 위의 양인농가는 곧 심각한 적자상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쉽사리 호전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당시 대부분의 농가가 관청으로부터 밀린 조세를 내라는 요구에 시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굶주리는 아이들의 등쌀은 야반도주로 농민을 내몰고 있었다. 이러한 소작농민들은 만성적자에 허덕이다, 농토를 잃고 농업이 아닌 다른 수단으로 생계를 꾸려가도록 내몰리게 되었다.
19세기 초반 농토를 지니지 못한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생계유지를 위해 금광에 맨몸의 노동력을 팔기 위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어떤 이들은 가족단위로 오기도 했는데 이 일은 농사짓기보다 이익이 나았다. 한 사람이 하루에 얻는 금이 적어도 예닐곱 푼쭝은 되어서, 돈으로 바꾸면 두세 냥이나 되었다. 동전 2,3냥이라면 미곡 반석에 해당하는 금액으로서, 가난한 농민들에게는 그것은 큰 액수였다. 이러한 금광의 일화는 얼마나 평민농민의 삶이 궁핍했었음을 더욱 잘 알게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농민의 궁핍한 삶은 그 당시 열악한 생산력으로부터 근본적으로 기인하고 있기는 있지만 이를 가중시킨 것은 지배계층의 수탈 때문이었다.
그러나 민중은 지배계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