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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실용설, 정합설, 대응설에 대해
오늘날과 같이 혼란한 시기일수록 우리는 사물의 본질과 현상의 구조를 자세히 이해하고 파악하는 능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격변하는 시대일수록 이러한 능력을 지니기가 어렵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혼란과 무질서가 더욱 심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 대처 방안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옳은가?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기준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진리‘라 부른다. 올바른 선택과 사고를 위해서는 논리가 필요하다. 진리는 정연한 논리 속에서 사고의 정당함을 밝히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올바른 선택을 위해서 진리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진리에 관한 학설에는 대응설(對應設), 정합설(整合設), 실용설(實用設)이 있다. 이것들을 순서대로 설명하고 장 단점을 비교 설명하고 과연 어떤 진리를 따라야 옳은 것인지 생각해 보려고 한다.
진리의 기준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철학자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들 수 있다. 그는 <형이상학>(Metaphysics)에서 ‘진리와 허위는 사태 그 자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유 속에 있는 것‘임을 강조했다. 이것은 ’사과는 빨갛다‘라는 판단은 사과가 빨갈 경우에, 바로 이 경우에만 진리가 되며 그것은 내가 그렇게 판단했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사태가 그렇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세의 스콜라 철학에서도 진리의 기준은 ‘사물과 지성과의 일치’(adaequatioreiet intellectus)여부에 달려 있다고 공식화 하였으며, 러셀(B. Russell)도 기꺼이 이 견해를 받아들였다.
이것을 진리의 대응론(對應設)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대응이란 우리들의 판단이나 신념…
는 전체적인 판단으로 구성되어 있는 복잡한 과학적 이론에 있어서는 그 진리성이 직접적인 감각적 경험에 의해 판정될 수 없으므로 그것은 훌륭한 진리의 기준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이론이 이미 통용되고 있는 이론체계와 잘 들어맞고 또 그 이론에 모순되는 형상이 발견되지 않는 한 그것은 진리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특히 수학이나 논리학과 같은 형식과학에서 이 점은 분명해진다.
그러나 정합성만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 데에도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많이 있다. 정합설과 비유됐던 퍼즐게임에서는 신념의 체계가 그림의 조각들과 그림 전체에 비교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는데, 만약 여기에 신념체계가 비슷한 그림들처럼 여러 가지고 있다면 어느 체계가 가장 좋은것 인지를 분별해야 하는 문제가 생기고 이것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려면 결국 관념론자들이 말하는 ‘절대’나 ‘실재’라고 부르는 신비의 궁극적인 존재를 설정해야 하므로 진리는 다시 한 번 미궁속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정합설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어떤 것이 그것이면서 동시에 그것이 아닐 수는 없다”는 원리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두 개의 판단이서로 모순되지 않을 때 그것을 ‘정합적’이라고 부르므로 이 모순율은 판단들이 서로 정합하는지, 다시 말해서 어떤 그림의 조각들이 서로 맞물려지는지 확인하기 위한 기준이 된다. 그러나 모순율 그 자체도 하나의 판단일 것인데, 그것은 진리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따라서 정합설은 그 자체로서 진리의 기준이 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결국 퍼즐의 조각들이 제각기 떨어져 있으면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그린 그림의 조각들인지 알지 않으면, 즉 실재와 대응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설득력이 없어지는 셈이다.
독일관념론의 완성자인 헤겔(F. Hegel)은 “오직 신만이 개념과 실재의 완전한 조합을 이루고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영원하고 불변하는 객관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고 또 존재하더라도 우리가 알 수 없으며 비록 알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