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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리더십
이승만에 대하여 우리가 갖고 있는 이미지는 다양하다. 이승만에 대한 이러한 이미지의 다양성은 그에 대한 호칭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이 박사’ ‘이 대통령’ ‘혁명가’ ‘국부(國父)’ ‘건국의 아버지’ ‘독립운동가’ ‘가부장적 권위주의’ ‘카리스마적 지도자’ ‘독재의 화신’ ‘늙은 독재자’ ‘외교의 귀신’ ‘인사의 등신’ ‘정략가’ ‘고집쟁이’ 등 이승만에 대한 호칭이나 닉네임이 다양하다. 한 사람에 대한 호칭이 다양하다는 것은 그에 대한 이미지가 다양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의 인성적 측면도 단일화된 분석으로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승만이 다양한 이미지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시대적?정치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의 성장배경은 한말의 정치적 위기가 고조되었던 시기이다. 거기에다 일본식민지라는 불안정한 정치적 배경이 오버랩 되었던 시기였다. 이와 함께 유교적인 사회적 배경이 여전히 지배적이었다. 더구나 당시로서는 쉽게 생각할 수 없는 미국에서 선진학문을 공부한 배경도 있었다. 이렿게 복잡한 그의 성장배경과 당시의 어지러운 사회적 배경이 그에 대한 다양한 이미지를 갖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승만의 이러한 리더십의 배경을 바탕으로 이승만 개인의 선전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이승만의 리더십이 갖는 선전에 대한 특성을 고찰하는 것이 목적이다. 따라서 이승만 시대에 행해졌던 선전에 관한 수단이나 방법보다는 이승만의 리더십을 중심으로 선전의 특성을 분석할 것이다.
정치지도자의 리더십의 형성은 다양한 배경을 통해 형성된다. 그의 성장 배경, 교육 환경, 가족 관계, 시대적 배경, 정치적 배경 등이 리더십 형성의 주요 요인들이다. 이승만의 리더십은 이러한 여러 요인들에 의해서 형성되었다고…
령, 수상, 총리 등으로 추대되었다. 특히 1919년 4월에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초대 국무총리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제를 주장하고 스스로 대통령이라는 직함을 사용하여 임정내부에서 논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결국 임정의 직제를 대통령제로 고치게 되었다. 이 때 그는 워싱턴의 구미위원부의 책임을 맡아 외교활동에 주력하였으나 미국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반대에 봉착하였다. 1920년 12월 다시 상해로 건너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임정의 대통령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여 임정의 활동에 제약을 주었다. 이승만의 이러한 독립운동 활동과 직책이 주는 배경은 그의 이미지를 확대시켰다. 독립운동가로서, 비록 임시정부이었지만 대통령이라는 이미지가 ‘국부’ 또는 ‘독립운동가’라는 이미지를 심었던 것이다. 물론 그가 해방 이후 초대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이미지가 굳어질 수 있지만 이러한 이전의 배경이 크게 작용하였던 것이다.
해방 이후 이승만은 독립촉성중앙위원회, 대한민국대표민주의원의장, 민족통일총본부 등을 이끌며 정치활동을 하다가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무투표 당선되어 초대 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그는 내각책임제를 반대하여 대통령제로 헌법을 바꾸는데 강력한 역할을 하였고, 결국 7월 초대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미국에서의 학문적 경험과 생활이 그가 대통령제를 선호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이는 아직까지도 권력구조논란이 빚어지고 있지만 이에 대한 충분한 논의와 토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권력의 핵심에 있는 주요 인사 몇몇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는 1951년 12월 6?25로 피난 와중에서 부산에서 자유당을 창당하였고, 다음해 정치파동을 일으켜 대통령직선제로 개헌하여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1954년에는 이른바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을 강행하였고,1) 1956년 선거전에서 야당인 민주당 후보 신익희의 급서로 투표권자 56%의 지지를 획득하여 3선 대통령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