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서론
1910년 한일 합방조약 이후 일제는 식민지배에 대한 학문적 기반을 확고히 하고 식민통치에 목적을 정당화하기 위하며 한국의 독립의지를 꺽기위한 수단으로 왜곡된 한국사관을 만들어 내자 이에 대응한 대표적인 두학자인 안확선생님과 신채호선생님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일제의 식민사관에 대응하셨다. 그렇다면 이분들은 어떻게 식민사관에 대응했을까?
2.본론
안학과 신채호의 공통점
시데하라 히로시는 그의 저서 한국정쟁지에서 ‘한국의 정치는 사권의 쟁탈에서 유래한다. 정가(政家)는 한번 정국을 담당해 일을 행하려 하면 여러 의론이 백가지로 나오고 유언비어가 떠들썩하게 퍼지며, 음모를 꾸미면 암살을 꾀하고 한번 집권하면 정적을 일망타진하는 참화를 불사한다.’1) 라고 말했다. 이말의 핵심은 당쟁이 조선의 망국을 불러 일으켰으며 당쟁을 통해서 조선은 통치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그망국의 자리를 일본이 대신들어간것이지 절대로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다거나 전쟁을 일으킨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이주장에 대해 안확선생님은 조선 시대의 특정적 정치 형태로 나타난 당쟁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지 않고, 이를 적극적 정치의 발달로 긍정하였다.안확선생님에 따르면 조선 시대에 와서 비로소 당쟁이 발생한것은 일반 인민의 정치상 토의가 얼만큼 자유로워진 참정권의…
그렇다면 신채호 선생님은 어떻게 식민사관에 대항했을까? 당시 일제의 식민사학자들은 조선의 역사는 기자조선과 한군현에서 시작되고 삼국시대에는 가야가 일본의 식민지로 고구려 신라 백제가 조공을 바치고 북쪽은 중국의 지배를 받고 남쪽으로는 일본의 지배를 받는다며 자주성이 없고 타율적인 민족이였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각기 방법은 다르지만 자산 안확선생님과 단재 신채호선생님은 일제치하의 시대에 식민사관으로 조선의 독립의지를 꺽을려던 일제치하에 대항하였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과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에 대한 두학자의 차이점
여 형제를 죽이는 것과 다를 바 없다.....(중략) 그러나 태종대왕 김춘추에 이러서는 그가 이 일을 위하여 온 마음과 온 힘을 다 쏟았고, 온갖 수완을 다 사용하였으며, 그리고 끝내 이 일을 성취한 후에 득의양양해 마지않았던 자이다.’5) 영토로서의 민족사관에 관한 관심이 많았던 신채호 선생님께서는 김춘추를 사대주의자 김유신은 간사한장수라고 주장하고 신라가 외세를 끌여들였기 때문에 우리의 영토가 줄었다며 이같은 신라의 통일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민권과 혈연공동체 그리고 문화에 주목했던 안확선생님께서는 이렇게 주장하셨다. ‘생각건대 신라가 통일의 업적을 달성함은 2대 원인에서 나온 것이다. 첫째는 왕위 계승의 특색이다. 그 왕위는 세습제로 되었으니3가 곧 박 석 김 3성이 있어 자격자가 차례로 서로 이으니, 일국 주권자가 대대로 능력이 있으며 그 정치는 결코 퇴보될 리가 만무하다.....(중략) 위로는 유명한 정치가가 끊인 일이 없고 동시에 밑으로는 국민일동의 원기가 왕장(旺壯)하였다. 곧 화랑이란 청년단이 있어 무사의 기질을 크게 발휘하니, 이것이 둘째 원인이다.....(중략) 국민 일치로 충용심을 가졌으니, 이렇고야 어찌 통일의 대업을 달성치 못하였으랴.....(중략) 사상계에도 더욱 전실하여지고 각항목의 예술도 매우 발다라여 문화가 점차로 찬란해졌던 것이다.’6) 신채호선생님의 주장과는 달리 안확선생님은 위같은 주장으로 신라가 원래부터 삼국을 통일 할 수 있는 제도적능력과 힘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또한 같은 민족을 배반했다는 신채호선생님의 말에 안확은 삼국시대에는 민족의 개념이 없었으니 신라가 민족을 배반했다는 주장은 성립되지않으며 현재의 시각으로 과거를 바라봐서는 않된다고 주장하였다.
2.묘청의 서경천도운동
신채호선생님은 조선사연구초에서 이렇게 주장하셨다. ‘서경 전쟁(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역대의 사가들은 다만 왕의 군대가 반역의 무리들을 친전쟁으로 알았을 뿐이나, 이는 근시안(近視眼)의 관찰이다.그 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