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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
(태조 왕건에서 본 궁예의 모습과 기독교적 고찰, 역할, 기법, 시사점, 나의견해, 총체적 조사분석)
KBS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역사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그 주인공인 왕건보다도 궁예가 세간의 더 큰 주목을 받았다. 궁예가 죽은후에 시청율이 뚝 떨어져다는 사실이 이를 반영한다. 왜 이처럼 시청자들의 관심이 궁예에 몰려졌을까?
물론 궁예역을 맡은 김영철씨의 연기가 돋보였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드라마상에서의 궁예가 역사의 궁예와는 다르게 해석되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KBS 드라마 <태조 왕건>의 궁예해석은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역사적인 궁예는 애꾸눈에 폭군이었으나 드라마에서는 해석이 전혀 다르다. 비록 후리게 정치적 위기에서 콤플렉스와 종교적 광기를 드러내며 비정상적인 국가 운영을 하였으나 젊어서는 백성들의 고난에 동참하고 고난을 함께 나눈 민중적인 혁명가이자 고구려의 영토회복을 통해 민족의 웅대한 기상을 살리려했던 영걸이었다.
궁예는 비록 신라 왕실의 혈통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그 성장과정은 철저히 민중적인 것이었다. 궁예 연구가 이재범씨에 따르면 그는 일종의 ‘재가 승려’였던 것 같다. 재가 승려란 열심히 경을 읽고 수행하는 모범적인 승려가 아니라 세상에 뜻을 둔 인물이다. 이것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궁예의 옛 모습과 흡사하다. 이처럼 낮은 신분의 재가승려 출신인지라 그의 정치적 이상은 철저하게 모든 형태의 억압이 소멸된 종말론적인 미륵 유토피아 세상이었다. 언제나 유토피아를 꿈꾸는 이들은 가진 것이 없는 민…
이와 달리 왕건은 원래 패서 지방 해양 호족 출신이라, 신라와 우호적으로 내왕하며 상호 이익을 누리던 처지인고로, 이후 신하에 대해 계속 우호적 관계를 누리려고 한 것과 비교하면 궁예의 대 신라 정책의 본질이 민중적 변혁 사상에 기초한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보지 않았다. 그러나 궁예의 미륵 사상은 이러한 전통 불교와 완전히 단절된 ‘반 석가사상’이었던 것이다.
그 증거로 오늘날 궁예 경전의 일부라고 전해지는 내용이 ‘함흥무가’에 남아있는데, 그 내용이 기존의 불교교리와는 크게다르다.
궁예는 일종의 정치, 종교 복합체인 신정정치체제를 꿈꾸었던 신흥종교 교주와 같다. 종교의 초월적 본질을 무시하고 불교를 왕권의 직접 통제 아래 두려고 했기 때문에 그는 불교의 전면적 저항에 직면하고서 무너지는 비극을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자신을 ‘미륵불’, 두 아들을 ‘청광’과 ‘신광’의 보살로 상징화시킴으로써 세속적인 정치권력과 정신적인 종교 권력 모두를 자신의 지배 아래 두려고 한 것이다. 궁예는 왕인 동시에 미륵이 되고자 했고, ‘왕미륵’이 되고 싶어했다. 고대 사회에서 왕권을 신격화하기 위하여 종교를 국가 수호체제로 이용하거나 국가 종교체제로 만들어, 국왕이 친히 종교의 수장이 된 경우는 허다하다. 로마의 ‘가이사 숭배 사상’이 일종의 종교적 통치 이데올로기의 전형이었으며 초대 교회는 그에 저항하였다.
궁예는 ‘정교 분리의 원칙’ 즉, 칼빈주의의 ‘영역주권의 이론’과 같은 세련된 통치철학을 갖지 못했다. 비 종교화함 없이 종교의 원리를 그대로 정치에 원용하려는 시도는 항상 지극히 위험한 오류와 마귀적 증오에 빠지게 된다. 정치적 적대세력을 ‘마군’, ‘마귀’로 몰아붙이며, 정치적 대립을 종말론적 대립으로 뒤바꾸어 놓아, 적과 차협할 수 있는 여지를 스스로 갉아먹는 정치 형태가 바로 이 ‘미륵정치’, ‘미륵 관심법 통치’의 한계인 것이다. 인간 세상에서 정치 권력과 군대의 힘과 법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유토피아를 이룰 수 없으며, 오히려 더 악한 지옥을 이룰 뿐이라는 것이 2000년 기독교 역사와 인류사회의 교훈인 것이다. 예수님은 궁예처럼 민중 혁명으로 다윗 메시아 왕국을 이룰 수 있다고 믿고 있던 당시 유대 민중(열심당)의 정치적 메시아니즘을 항상 경계하셨다. 그리고 이것을 사탄의 유혹으로 간파하셨다. 하나님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