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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
(세종의 인간경영 리더쉽 및 인적자원 경영 성공요인 총체적 조사분석)
목 차
1. 세종 - 재주 있는 신하에게는 관대하라
2. 세종 - 사람에 대해 편견을 갖지 마라
3. 세종 - 먼저 말하지 말고 먼저 들어라 (숙의에 의한 정치)
4. 나의 의견
세종대왕이 어떤 식견을 가지고 어떻게 조직에 생기를 불어넣었으며, 무슨 고민을 했고 어떤 노력들을 기울였는가를 알아봄으로써, 우리는 젝 웰치나 빌 게이츠 같은 서양의 경영자가 아닌 `한국인으로서 한국인을 가장 잘 경영했던 인물’에 대한 모범적 사례를 발견하게 된다.
시대의 변혁을 꾀한 리더 세종대왕
위대한 인물들은 누구나 그의 마음 깊은 곳에 불멸하는 추동력을 가지고 있었다.
저자는 세종대왕이 가슴속에 품었던 의지를 ‘긍정적인(포지티브한) 허무’라고 얘기한다.
그것은 그가 국초 국말의 권력쟁투와 무너져가는 인간사의 허무에서 발견한 것이 다름 아닌 인간 존재에 대한 측은지심이었고, 그것이 다시금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되었기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세종은 국초에 권력투쟁의 과정에서 그의 아버지 태종에 의해 수많은 목숨을 희생되는 것을 보았다. 이로 인해 세종의 심중에는 ‘적극적인 역사 개척보다는 허무에 기반을 둔 인간사와 인생에 대한 연민’이 자리잡게 되었으며, 바로 그것이 그가 역사를 이끌어간 동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세종의 두 형들은 골치 아픈 왕의 자리에서 도망쳤다.
첫째 형은 미친 척했고, 둘째 형은 중이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세종이 선택한 길은 노자의 도(道)인 ‘대은(大隱)은 어시은(於市隱) : 깊게 은둔하는 것은 시끌벅적한 시장 속에서 세상사람과 동고동락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이었다.
세종이 평생 실천한 실사구시(實事求是: 사실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탐…
할 인물은 황희다. 황희는 태종의 총애를 받다가 세조교체 2년 전 양녕이 구종수의 꾐에 놀아나 기생들과 방탕하게 지낸 적이 있었는데 이를 알고 있던 황희가 태종에게 사실을 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세자 교체 직전인 태종 18년 5월에 경기도 파주의 교하로 귀양을 갔다가 그 후 남원으로 이배된 인물이다. 태종의 명으로 한양으로 돌아와 한직에 머물던 황희를 과감하게 발탁해 올린 것이다.
■ 세종 4년 2월 29일 (병진) 004 / 황해도 관찰사 이수와 경력 하형을 처벌하다
황해도 관찰사 이수(李隨)와 경력 하형(河逈) 등이 함부로 음탕하고, 법도가 없어서, 관기(官妓)를 거느리고 도내(道內)에 돌아다니면서 혹은 말을 나란히 타고 다니기도 하였다. 하형은 기생의 어미가 죽어도 분상(奔喪)하지 못하게 하고, 이수는 체임(遞任)되는 날에도 기생을 이끌고 돌아왔다. 일이 발각되매, 헌부(憲府)에서 이를 탄핵하여 형(刑)에 처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수는 특별히 용서하고, 하형은 곤장 80대를 치고 그 직첩(職牒)을 회수하였다. 이수는 임금이 일찍이 그에게 배웠으므로, 초야(草野)에서 일어나 몇 해가 되지 않아서 벼슬이 재추(宰樞)에 이르니, 조정과 민간에서 놀랍게 보았는데, 하루 아침에 감사가 되매 함부로 음탕하고 마음대로 행동하여 나라의 법을 범하니, 식자(識者)들이 그를 비웃었다.
■ 세종 6년 1월 29일 (병오) 004 / 영의정 유정현의 고리대에 관한 효령 대군의 꾸짖음
전 판부사(前判府事) 정역(鄭易)의 집 종이 영의정(領議政) 유정현(柳廷顯)의 장리(長利) 돈을 꾸어서 썼는데, 연사가 흉년으로 가난하고 궁핍하여 미처 갚지 못하였더니, 정현이 수배(隨陪)하는 조례(??)를 구노(具奴)의 집에 보내어 그의 가마[釜]와 솥[鼎]을 모조리 빼앗아 왔다. 역이 효령 대군에게 고하여 정현에게 도로 내어줄 것을 청하였다. 효령이 정현의 아들 총제(摠制) 유장(柳璋)을 불러 말하기를, “네 아비가 지위가 수상(首相)에 이르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