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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살펴 본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의 관계)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살펴 본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의 관계
어떤 집단의 종파상의 소속이 그 집단의 경제적 현상의 원인인지, 아니면 그 결과인지는 확실히 말하기 어렵다. 아마도 원인 또는 결과 모두로서 작용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종교가 삶의 형식을 바꿀 수 있고, 그것은 경제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막스 베버는 자본주의적인 부의 축적과 프로테스탄티즘의 관계에 주목한다.
실제로 많은 부분에서 종교개혁 이후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티즘은 대립해 왔다. 가톨릭은 흔히 ‘비세속적인’것으로 생각되어 왔으며, 그것의 “최고의 이상인 금욕적 성격이 신자들로 하여금 현세의 재물에 대해 보다 강한 무관심을 보이게 하였다.”(p.27) 이에 반해 프로테스탄티즘은 ‘그 세속적인 물질주의’로 인해 가톨릭의 비난의 대상이 되어왔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세속성, 이것이 과연 자본주의적인 부의 축적의 원인이 될 수 있는가?
저자는 아니라고 답한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성격에 대한 이런 일종의 스테레오타입은 오히려 사실과 반대되는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의 초기 프로테스탄티즘은 “오늘날 가장 극단적인 종교가들도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인정하는 근대적 삶의 모든 측면에 대해 적대적이었다.”(p.31) 따라서 우리는 자본주의 정신과 프로테스탄티즘의 관계를 세속성의 문제에서가 아니라 그 순수한 ‘종교적 성격’으로부터 찾아야 한다.
프로테스탄티즘적인 자본주의 정신이란 어떤 것인가. 그 특징은 이 책의 1부 2장의 ‘자본주의 「정신」’에 인용된 벤저민 프랭클린의 글에 확연히 나타나 있다. 얼핏 보면 이것은 자…
를 가질 수 있다.” (p.79) 이것이 예정설이다.
초기의 칼뱅의 사상인 이 신의 선택에 대한 의문을 갖는 다는 것이 금기시 되었으나, 어쩔 수 없는 결과로 평신도들에게는 “나는 선택되었는가? 선택되었다면 나는 그 선택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p.85) 의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었고, 칼뱅주의는 이런 물음에 답변해야만 했다. “구원의 인식 가능성이라는 의미에서 구원의 확신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고, 예정설이 확립된 곳에서는 어디서든지 선택된 자에 속함을 인식할 수 있는 확실한 표지의 존재여부에 대한 질문이 곧 제기”되었다.(p.86)
이에 대한 답변으로서 칼뱅주의는 두 가지 특징적인 권고를 실시하는 데 그 첫째는 자신을 선택된 자로 여기고 모든 의심을 악마의 유혹으로서 거절하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자기 확신에 도달키 위한 가장 탁월한 수단으로서의 부단한 직업노동” 이다. “이러한 노동만이 종교적 회의를 씻어 버리고 구원의 확실성을 제공한다.”(p.93)는 생각이 등장했다. 이것이「소명설」의 등장 배경이다. 직업노동과 그에 따르는 자본의 획득은 칼뱅주의자들에게 하나의 소명이 되었다.
부단한 직업노동에의 충실한 집중의 성과를 증명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자본의 획득이다. 더 이상 자본의 획득과 끊임없는 이윤추구가 부끄러운 일이 아니게 된 것이다. 이윤의 추구는 삶의 영위를 위한 수단이 아닌, 이제는 그 자체가 목적으로서의, 소명으로서의 종교적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이를 위한 철저한 금욕적인 생활방식으로서의 방법론이 등장하였고, 이는 프로테스탄트의 생활의 격률 또는 미덕으로서 자리하게 된다.
프로테스탄트 금욕주의는 다음과 같은 다소 모순적인 생각들을 낳는다. “목적으로서의 부의 추구를 비난받아야 할 최악의 것이라 보면서도 직업노동의 열매인 부의 획득은 신의 축복”이라고 여기며, “부단하고 지속적이며 체계적인 세속적 직업노동을 단적인 최고의 금욕적 수단”이자 “거듭난 자와 그 신앙의 진실성에 대한 가장 확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