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차례
Report
(로제타스톤과 샹폴레옹의 역사 및 특징과 내용 조사분석)
Ⅰ. 로제타스톤
Ⅱ. 샹폴레옹
Ⅲ. 고찰
Ⅰ. 로제타스톤
프랑스 나폴레옹 이집트원정대의 한 초급장교가 1799년 우연히 발견했다. 로제타스톤이 발견된 이후, 지중해의 역사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동쪽으로 60km 떨어진 야자나무 숲에 쌓인 작은 마을 로제타(Rosetta)는 바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됐다.
로제타스톤에는 같은 내용으로 추정되는 글이 이집트 상형문자, 이집트 민중문자, 고대 그리스어 등 세 가지 문자로 새겨져 있었다. 길이 1.2m, 너비 75cm, 두께 28cm의 표면이 매끄러운 무게 760kg의 핑크빛 화강섬록암 비석 조각으로 해석이 가능한 고대 그리스어 부분은 이집트 마지막 왕조의 프톨레마이오스 5세를 칭송한 일종의 정치광고를 담고 있었다.
이 ‘돌’의 상징적 무게는 영국과 프랑스 원정대의...
본문/내용
Report
(로제타스톤과 샹폴레옹의 역사 및 특징과 내용 조사분석)
목 차
Ⅰ. 로제타스톤
Ⅱ. 샹폴레옹
Ⅲ. 고찰
Ⅰ. 로제타스톤
프랑스 나폴레옹 이집트원정대의 한 초급장교가 1799년 우연히 발견했다. 로제타스톤이 발견된 이후, 지중해의 역사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동쪽으로 60km 떨어진 야자나무 숲에 쌓인 작은 마을 로제타(Rosetta)는 바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됐다.
로제타스톤에는 같은 내용으로 추정되는 글이 이집트 상형문자, 이집트 민중문자, 고대 그리스어 등 세 가지 문자로 새겨져 있었다. 길이 1.2m, 너비 75cm, 두께 28cm의 표면이 매끄러운 무게 760kg의 핑크빛 화강섬록암 비석 조각으로 해석이 가능한 고대 그리스어 부분은 이집트 마지막 왕조의 프톨레마이오스 5세를 칭송한 일종의 정치광고를 담고 있었다.
이 ‘돌’의 상징적 무게는 영국과 프랑스 원정대의 거센 각축(角逐)을 불렀고, 당시 전투에서 승리한 영국군은 1801년 로제타스톤을 프랑스군으로부터 압수하여 본국으로 가져갔다.
지금은 런던의 영국박물관(The British Museum)에 그리스 파르테논신전에서 ‘수…
했다.
그러나 이집트의 문명에 인류가 관심을 갖기 시작했을 때, 람세스 2세의 다소 허풍 섞인 전승담(戰勝譚) 따위를 기록한 아부심벨의 그림과도 흡사한 문자를 비롯한 이집트 고대문자의 뜻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물결 도도한 나일강 동쪽 언덕의 숱한 사원들, 서쪽 골짜기의 무덤들, 기자의 피라미드 등 인류 최초의 거대문명은 한치 앞도 구분할 수 없는 안개 속에 갇혀있었다.
말 그대로 신비의 제국이었다. 뜻을 알 수 없는 신기한 모양의 문자들은 궁금증을 더했다. ‘역사(歷史)의 아버지’라는 별명까지 붙을 정도로 유명한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BC 484∼BC 425)가 저서 ‘역사’에서 묘사한 헤로도토스 시절의 이집트 이야기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역시 ‘카더라’의 수준을 크게 넘는 것은 아니었다.
상상도 할 수 없을 찬란한 문명을 바로 코앞에 두고서도, 눈에 보이는 사물의 이면(裏面)에 서려있을 역사와 신화(神話)의 스펙트럼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문자를 읽을 수 없어서 생긴 상황이었다.
이교도(異敎徒)들이 밀려들어 시나브로 스러져간 고대문명국가 이집트의 몰락은 이처럼 처절했다. 문명의 근간(根幹)이자 증거(證據)이고, 다음 문명을 일으키는 동력(動力)이 되는 자신의 문자까지 잃어버린 것이다.
프랑스의 야심가 나폴레옹 1세(1769~1821)는 지중해를 건넜다. 이집트는 당시 거대 세력 영국과 프랑스의 ‘밥’이었다.
최후의 여왕(재위 BC 51∼BC 30) 클레오파트라의 몰락(沒落) 당시 이집트가 로마 제국의 시저와 안토니우스의 ‘장난감’이었듯이, 고갱이를 잃은 ‘나일강의 선물’ 이집트는 하릴없이 자신의 속살을 침략자들의 말굽과 포화(砲火)에 내줄 수밖에 없었다.
유럽의 호사가와 투자가들로 카이로와 룩소르가 시끄러웠다. 도굴과 약탈, 문명의 범죄가 강자(强者)의 당연한 권리였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등지의 박물관들이 지금 자랑해 마지않는 이집트 유물(遺物)들의 도적질 현장이었다.
역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