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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대표하는 디자이너
영화 타이틀 시퀀스의 시초 솔바스(Saul Bass,1920-1996)
앨빈 러스티그, 폴랜드, 브레드베리 톰슨과 더불어 2차세계대전후의 미국 그래픽 디자인을 대표하는 디자이너인 그는 영화 타이틀부터 시작해서 나중에는 CI, BI 작업까지 하며 그의 디자인 세계를 넓혀갔다.
두 가지는 정말 달라 보이지만 두 가지 모두 결국 상징하고 요약하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공통된 구석이 있다.
그는 함축의 달인이었다.
그는 뉴욕에서 디자인 공부와 프리랜서 디자이너 생활을 하다가 1946년에 캘리포니아로 이주하여 자신의 스튜디오를 열었다. 뉴욕파의 감성을 영화의 메카인 LA에 이식한 그는 자연스럽게 영화 관련 디자인을 하게 되었다. 기존의 영화 홍보는 배우들의 초상화를 사용하는 진부한 방식이었지만 솔 바스에 의해 그래픽적인 표현이 새롭게 소개되었다.
오토 프레밍거(Otto Preminger) 감독은 그에게 영화를 로고 디자인부터 포스터와 광고 그리고 타이틀 디자인까지 하나의 통합된 그래픽으로 만들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렇게 해서 영화에서 인쇄와 영상 그래픽이 서로 통합된 최초의 디자인 프로그램이 1955년 프레밍거의 <황금팔을 가진 사나이(The Man with Golden Arm)>를 위해 만들어졌다. 이로 인해 그는 영화 타이틀 디자인의 대가로 명성을 얻게 되고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 등 거장 감독들의 단골 디자이너가 되었다.
솔 바스 디자인의 특징은 시각적 복잡성을 과감하게 제거하여 간결한 그림 문자적인 이미지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에 있다. 1960년 <엑소더스(Exodus)>의 영화 디자인 프로그램에서 그의 전형적인 특성이 잘 드러난다. 이스라엘의 탄생과 투쟁 과정…
▲ <현기증>의 포스터
마틴 스코시즈는 “솔바스의 타이틀이 스크린에 나타나는 순간, 진정한 영화가 시작된다”고 말한적이 있다.
었다. 많은 디자이너들은 예술가적 기질과 다자인을 본질적인 개념 사이에서 때로는 갈등을 겪으면서도 새로운 시각언어로 다자인의 이상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09년 이탈리아의 시인 필리포 마리네티(Fillippo Marinetti)가 주동한 “모든 예술은 과학과 산업사회의 새로운 현실의 바탕 아래 혁명적인 운동으로 확립시켜나가야 한다”는 요지의 ‘미래파 선언’이 있었다. 그 후 10년간 유럽의 예술가들은 새로운 관념을 놀라운 속도로 받아들이면서 스스로 혁신의 장을 열어가기 시작했다.
러시아에서는 ‘구성주의’가, 네덜란드에서는 몬드리안을 이론적 지주로 발족한 스틸 운동이 일어났다. 이런 사상적인 바탕 위에 독일에서는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의 공통적인 뿌리를 인식하고 미술과 기술의 새로운 통일을 꾀하려는 목적으로 발터 그로피우스가 중심이 된 국립 바우하우스가 바이마르에 세워진다.
이렇게 유럽에서 새로운 물결이 일고 있을 무렵인 1918년 허브 루발린은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혼재한 미국에서 태어났다. 왼손잡이인데다 말이 없고 바짝 마른 체구의 약골에 색맹이었던 어린시절의 모습을 보고는 후에 미국을 대표하는 위대한 디자이너가 될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시절에 디자인과 레터링에 약간의 재능을 보이기는 했지만 사물을 정확히 묘사하는 데생력은 수준 이하였다.
고등학교 성적도 매우 낮았고 가정형편도 나빴던 그는 일반대학에 진학할 수가 없었다.
그가 선택할 수 있었던 곳은 자유미술학교뿐이었다. 1935년 루발린이 적성검사 형식에 불과했던 입학시험을 치르고 입학한 곳이 쿠퍼 유니온이었다. “그때 나는 64명의 응모자 중 64번째였다. 입학 후 처음 2년간은 가장 형편없는 학생이었고, 마지막 2년은 가장 훌륭한 학생이었다”라고 나중에 그는 당시를 회상했다.
그가 쿠퍼 유니온에 다닐 무렵 미국의 그래픽다자인계는 별로 볼품이 없었다. 1936년 워커 에반스가 찍은 거리풍경에 나오는 광고 게시판이 증명하듯이 전통적인 일러스트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