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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코뮌과 마르크스
1. 들어가며
파리 코뮌이 등장하자 마르크스는 그 열열한 옹호자가 되었다. 그것은 그의 가장 영향력이 강한 논문중의 하나인 ??프랑스의 內戰?? (처음에는 <인터내셔널>에 제출되었으나 그 후 팜플릿 형태로 배부되었다)의 집필 계기가 되었다. 마르크스가 그 후 줄곧 그의 이름과 연결되어 따라다닌 하나의 악명-그 자신이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스로 자랑스럽개 묘사했듯이 “런던에서 중상과 위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라는 악명(McLellan, Marx, His Life, p. 402)-을 얻은 것은 파리 코뮌에 대한 옹호에 기인한 것이었다. <인터내셔널>이 어느 정도 파리의 소요를 음모했으며 그 배후에는 카알 마르크스라는 “악마”가 있었다는 사실을 反社會主義집단은 널리 믿고 있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이때가 활동가로서의 그의 생애의 정점이었다.
2. 파리코뮌의 기원
<普佛戰爭>에서의 프랑스의 패배로부터 비롯한 코뮌의 起源은 심히 복잡한 이야기이다. 심한 혼란을 야기시키는 원천중의 하나는 “코뮌”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다양한 방법이다. 그 용어는 파리시민의 자치정부는 물론 흔히 소요를 지칭하기도 하는데, 프랑스에서 “코뮌”이란 용어가 의미하는 것은 시민의 자치정부였다. 프랑스의 모든 주요 도시들은 코뮌정부 혹은 자치정부를 가졌다. 그러나 파리코뮌은 특별한 역사와 혁명적 신비성을 가졌는데 이는 1789년과 1795년 사이에 파리의 쌍-뀔로트들이 자치정부의 조직을 통해 국민정부에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파리코뮌은 파리의 인민대중을 모으는데, 그리고 1792-93년에 외국의 침략에 의해 위기에 처한 조국(la patrie en danger)을 위해 모여던 지원병을 조직하는데 영웅적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도 기억되었다.
그러므로 1870-71년에 있은 새로운 자치정부적 선거에 대한 요구는 단순한 애국적 의의…
3. 파리코뮌과 마르크스
었다. 동일한 이유로 인해 혁명적 좌파의 지도자들은 비타협적이었고 敵을 프랑스로부터 내몰 때까지 철저히 싸울 것을 촉구했다. <국가방위 임시정부>가 강화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했으므로 그것과 파리의 시민군대간의 관계가 점점 더 소원해졌다.
이 시기에 활발하게 등장한 시민적 組織들-클럽? 국민방위대? 신문? 음모집단 등-에서 프랑스 고유의 이데올로기와 傳統은 마르크스주의보다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도적 활동가들, 특히 토착 프랑스인들 중에는 마르크스주의자는 거의 없었다. 심지어 <인터내셔널>의 회원들도 주로 프루동주의자들이었다. 쟈코뱅적 색채를 띈 사람들 중에서도 다수는 비록 사회적 정의와 개혁에 여전히 몰두했지만 분명히 비社會主義者들이었다. 나머지 대부분은 블랑키주의자와 社會主義적 쟈코뱅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信念 사이의 차이는 언제나 명확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의 다수의 행동주의자들을 분류시킬 수는 없었다. 그들은 모두 다 철저한 애국자들이었고 대개의 경우 그들은 부유하고 나태한 자들을 “패배주의자” 혹은 심지어 “반역자”라고 회의하였다. 프루동주의자들은 분명히 자신들을 “社會主義者” (혹은 “상호부조론자” 혹은 “연방주의자”)로 부르면서도 사유재산 및 개인주의 등의 문제에서는 非社會主義的 쟈코뱅주의자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프루동주의자들은 1860년대의 노동운동에 적극적 역할을 한 사람들이었는데 비해 쟈코뱅주의자들과 블랑키주의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각종 신념을 가진 대부분의 활동적인 사람들은, 그중에 부르즈와 출신으로서 몰락한 지성인의 중요인사도 있었으나, 파리의 小부르즈와 및 숙련공들 출신이었다. 공장 노동자들은 단지 조그만 역할 밖에, 특히 보다 뚜렸한 지도자들 가운데서는 조그만 역할 밖에 하지 못했다.
3. 파리코뮌과 마르크스
프랑스에서의 괄목할만한 산업적 성장을 경험한 세대는 1848년 이래 사라졌지만, 1871년의 파리출신 행동주의자들은 대개 1848년의 사람들을 닮았으며, 마르크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