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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보충대와 천인의 신분변동
1. 성종의 급양인(及良人)
1476년(성종 7년)부터 친정(親政)을 시작하였는데, 그 이전엔(1469년) 13세의 어린 나이로 성종은 왕위에 올라 7년간 세조비(世祖妃) 정희대비(貞熹大妃)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다. 또한 원상제(院相制)가 실시되었다. 이 둘은 신권이 왕권보다 우위에 서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성종대엔 양인확대정책은 크게 축소되었으며, 양인비첩 소생의 보충대 입속이 대폭 축소되거나 금지되었다. 이러한 정치변동에 따라 양반지배층의 사적 토지소유에 기초한 농장이 확대되고 토지를 상실한 자영농민층의 급격한 계층분화가 진행되었으며, 토지에서 이탈한 농민들은 농장노비가 되거나 신분적으로 노비화 되어버렸다.
경국대전의「공사천과 양부간에 출생한자는 본주의 뜻에따라 속신하고 양인이 된다.」는 규정과, 보충대 진고법(陳告法)을 실시하여 종천(從賤)의 법위를 확대한 이 두 가지의 규정에 의해 성종 초의 양인확대정책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본주의 뜻에 따라 속신하게 된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종량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다. 또한 보충대 진고법을 실시하여 나타난 사회적 폐단을 살펴보면, 대소인원의 비첩소생은 보충대에 입속할 대상자인데, 만약 나이가 16세가 되어도 진고하지 않거나, 입역하지 않는 자는 타인이 진고하면 즉시 환천되었고, 뿐만 아니라 누락된 보충대를 적모나 적동생이 직접 진고할 경우 기공친이 노비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향리, 역리, 염간, 목자 등의 자기비첩 소생이 아비의 신역을 이으면 양인신분을 획득하였던 것과 비교할 때, 대소인원의 비첩 소생이 역리의 비첩소생보다 신분적 지위가 오히려 낮아지는 결과가 초래하게 되었다. 따라서 보충대 한사람이 천인이 되면, 나머지 동생들과 자손들도 모두 연좌되어 천인(賤人)되는 폐단이 생겼다.
수령청정이 끝나고 성종의 친정이 실현되는 동왕 15년을 …
2. 훈구파와 신진사림 사이의 중종
3. 임진왜란의 발발과 급변하는 신분
4. 광해군 시대의 크게 달라진 천인들의 종량(從良)
조건 대신 천인에게 임진왜란 중 공사천이 왜군을 참수(斬首)하면 그 수급(首級)의 숫자에 따라서 1급이면 면천하고, 2급이면 우림위(羽林衛)에 제수하고, 3급이면 허통(許通)하고, 4급이면 수문장에 제수하는 방식으로 군역의무를 담당시켰으며, 전쟁기를 통해 재정적 타격을 받은 조선왕조 정부는 텅빈 국고를 채우기 위해 납속보관제를 실시하여 특히 군량미 조달을 위해 소위 납속보관(納粟補官)의 길을 넓게 열었고 그것을 통해 특히 서얼?향리층이 많이 양반으로 상승했다. 임진왜란중의 납속사목에 의하면 향리의 경우 30섬을 바치면 면역되어 참하경직(參下影織)을 받을 수 있었고 80섬을 바치면 동반의 실직(實織)을 받을 수 있었다. 서얼의 경우도 5섬만 바치면 겸사복이나 우림위, 혹은 6품의 서반 군직을 받을 수 있었고 50섬이면 5품 영직, 60섬이면 동반 9품, 80섬이면 동반 8품, 100섬이면 동반 6품을 받을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 다소 여유만 있으면 양반신분을 얻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서얼은 조선왕조 양반사회의 자기도태작용으로 생겨난 하나의 계층이었으나 왕조 후기에는 납속보관 등의 기회를 타서 양반신분으로 상승하는 길이 열렸다.
4. 광해군 시대의 크게 달라진 천인들의 종량(從良)
보충대의 성격이 조선시대 전기와 후기를 통해서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데, 광해군대에 이르러 속신을 통한 종량이 이미 보편화됨으로써 보충대 입속자들도 개월 수에 상관없이 불법으로 거관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라 사료된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조선 전기의 경우 보충대 신분으로 병조와 훈련원에서 30개월을 근무하면 도목정사에서 거관하기를 기다려 군역에 충정 되었으나 광해군 당시에는 보충대를 통한 종량의 폭이 확대됨으로써 보충대에 입속한 자들이 도목정사를 기다리지도 않고 하루 만에 거관하였고, 이 현상은 인조 대에도 계속되었다.
당시 상업과 수공업 및 화폐경제의 발달, 농업경영방법의 발달로 부농층이 생겨났으며, 이들은 쉽게 돈을 지불하고 불법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