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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대표 학자 이황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으로 1501년에 출생해서 1570년에 그 생을 마쳤다. 본관은 진보. 자는 경호, 호는 퇴계·퇴도·도수이다.
2. 가계
경상도 예안현??온계리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온혜리)에서 좌찬성 식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에 외간상을 당하였으나, 후실이었지만 자모요 현부인이었던 생모 박씨의 훈도 밑에서 총명한 자질을 키워갔다. 12세에 작은아버지 우로부터 를 배웠고, 14세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특히 도연명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고 한다.
20세경 침식을 잊고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그뒤로부터 다병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한다.
3. 출사와 관직
28세에 (1528)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33세에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와 교유하고 심경부주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하였다. 이해 귀향도중 김안국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34세(1534)에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37세에 내간상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간 복상하였고, 39세에 홍문관수찬이 되었다가 곧 사가독서에 임명되었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먼저 낙향하는 친우 김인후를 한양에서 떠나보내고, 이 무렵부터 관계를 떠나 산림에 은퇴할 결의를 굳힌듯, 43세이던 10월에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삼아 사가를 청하여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을사사화 후 병약을 구실삼아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46세(1546)가 되던 해 향토인 낙동강 상류 토계의 동암에 양진암을 얽어서 산운야학을 벗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생활에 들어갔다. 이때에 토계를 퇴계라 개칭하고, 자신…
4. 학문
판서에 임명하였으나 신병 때문에 부득이 귀향하고 말았다.그러나 이황의 성망은 조야에 높아, 선조는 그를 숭정대부 의정부우찬성에 임명하여 간절히 초빙하였고, 그는 사퇴하였지만 여러차례의 돈독한 소명을 물리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무진육조소를 올렸다. 선조는 이 소를 천고의 격언, 당금의 급무로서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맹약하였다 한다.그뒤 이황은 선조에게 정자의 사잠 , 논어집주·주역, 장재의 서명 등의 온오를 진강하였다.노환 때문에 여러차례 사직을 청원하면서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를 저술,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이듬해 69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히 환고향을 간청하여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환향 후 학구에 전심하였으나, 다음해 70세가 되던 11월 종가의 시제 때 무리를 해서인지 우환이 악화되었다. 그달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키고, 일으켜 달라 하여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 영사를 추증하였고, 장사는 제일등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집행되었으나, 산소에는 유계대로 소자연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라 새긴 묘비가 세워졌을 뿐이었다.죽은지 4년 만에 고향사람들이 도산서당 뒤에 서원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낙성, 도산서원의 사액을 받았다. 그 이듬해 2월에 위패를 모셨고, 11월에는 문순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4. 학문
이황이 주자대전을 입수한 것은 중종 38년, 즉 그의 43세 때였고, 이 주자대전은 명나라 가정간본의 복각본이었으며, 가정간본의 대본은 송나라 때 간행된 것을 명나라 때 복간한 성화간본의 수보본이었지만, 그가 주자대전을 미독하기 시작한 것은 풍기군수를 사퇴한 49세 이후의 일이었다.이황은 이에 앞서 이미 심경부주·태극도설·주역·논어집 등의 공부에 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