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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적 공산주의의 기원
1. 젊은 시절의 마르크스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한 여러 설명은 흔히 마르크스주의를 獨逸?프랑스?英國 등의 지적 전통, 특히 獨逸의 철학, 英國의 정치경제학 (혹은 고전경제학), 프랑스의 社會主義이론의 종합으로 묘사한 엥겔스의 선례를 따르고 있다. 우리는 단순화시킨 이 형식화를 상기의 세 전통이 겹쳐져 있고 서로간에 영향을 행사했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는 다는 전제하에서 일종의 편법으로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에 있어서 가장 감명 깊은 것은 분명히 그의 극히 독창적인 통찰력-그 스스로 그것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이 아니라 19세기 초의 이론과 현실을 일관성있는 하나의 전체로 집성하려고 시도한 방법이었다.
젊은 시절의 생활환경 덕분에 마르크스는 그와 같은 종합을 실현하는데 있어 아주 적절한 입장에 있었다. 모젤江邊에 위치한 기묘하고 고대적인 도시이며 프랑스와 룩셈부르크의 국경으로부터 거리가 멀지 않은 트리에르에서 개방적인 유대인가정에서 태어난 마르크스는 어린 시절부터 프랑스의 사상과 문화를 접했다. 그의 아버지 헤르셀(Herschel)은 계몽주의적 가치를 수용했으며 중요한 계몽사상가들과 친숙했다. 트리에르市는 프랑스대혁명과 나폴레옹제국 시대-마르크스가 태어나기 이전-에 프랑스의 한 부분이 되었고, 그 결과 유태인은 완전한 시민권을 얻었다. 그러나 나폴레옹 몰락 후 트리에르가 프러시아에 점유되자 헤르셀은 기독교로 개종하고 그와 그의 가족이 유대인으로서 프러시아에서 받게 될 公的 지위의 불편함을 줄이기 위해 하인리히(Heinr-ich)라는 기독교도 이름으로 개명했다.
1818년에 태어난 어린 카알은 그리하여 계몽사상적?인문주의적 분위기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유대인으로 자부하지 않았고 또한 그의 아버지가 기회주의적으로 수용한 기독교를…
대학생활을 마친 직후인 1840년대 초에 마르크스는 훨씬 더 발전된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논했다.
2. 헤겔과 변증법적 사고와 마르크스의 접촉
경우처럼 獨逸 철학자들의 핵심적 관심사였다. 양자의 이러한 관심은, 비록 獨逸人들이 매우 우회적이요 철학적으로 정치한 길을 통했을지라도, 처음에는 종교에 대한 비판으로, 다음에는 정치적?사회적?경제적 現狀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2. 헤겔과 변증법적 사고와 마르크스의 접촉
헤겔(G. W. F. Hegel: 1770-1831)은 獨逸 관념주의의 開祖的 사상가가 되었다. 그의 중요한 관심사 중의 하나는 로크나 흄 같은 계몽적 경험주의자들의 철학적 결론을 논박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18세기의 다른 사상가들과 같이 비판적 理性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면서도 그들의 철학은 대체로 이성에 대한 회의론적 입장으로 기울어진 것 같다. 그들은 감각적 경험이 우리의 유일?확실한 지침이므로 “이성에만의 의지”에 신중을 기해야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가면서 경험상의 지침이 없는 행동방향을 설정해서는 안된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이 입장에 잠재되어 있는 보수주의적 함축성은 흄에 의해 간결하게 제시되었다. 즉 “생활의 지침이 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관습이다. ” 그러므로 경험주의자들의 입장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결론은 관습이나 오랜 기간에 걸처 얻어진 지혜를 무시하고 자초지종 세상을 이성에 입각하여 재조직하려한 프랑스 혁명가들의 프로메테우스적 노력은 무모하고 지각없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독자들은 아담 스미스가 부분적으로 흄의 영향을 받아 역사적 경험에 의한 부분적 개혁만을 주장했다는 점을 상기할 수 있을 것이다. 헤겔과 기타 獨逸철학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英國의 경험주의자들, 특히 흄은 철학 자체를 위협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실제적?물질적 세계에서 보다 오히려 정신적 영역에서 그들의 이상이 성취되는 고도의 철학적 인간이라 자처하는 많은 獨逸人에게는 실로 가치전도적 견해였다. 이에 대해 헤겔은 다음과 같이 논박하였다. 즉 인간정신은 수동적인 경험의 記錄機 이상의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성은 단순한 경험의 한계를 초월하여 외적 세계에 관한 진리를 터득할 수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