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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의 경제적 변화와 계급 형성의 영향에 관하여
1. 사회관계와 경제구조 상황 변화 의식의 관계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사회관계들의 이러한 변화와 경제구조?상황의 변화에 대한 의식을 관련시킨다. 그 문헌에는 세 가지 임시 모델이 들어 있다.
첫번째로, 장기간에 걸쳐 작용한 구조적 변화가 항구적인 분열과 동요라는 결과를 가져 왔고, 고용과 식료품공급에서의 단기적 위기들은 단지 계급행동과 반응의 계기로서만 작용하였다. 사회적?경제적 관계들의 전면적인 붕괴는 재산소유 제도와 생산관계의 장기적 변화-토지의 엔클로우징, 자본과 토지 소유권의 집중, 도제제도의 소멸, 임금조정, 생산자로부터의 완만한 독립성 박탈-로부터 초래되었다. E.P. 톰슨에게 있어 산업혁명은 ‘인간본성에 가해진 폭력’이었고, 계급은 이것에 대한 하나의 대응이었다 [Saville, 1969; Foster, 1974; Hobsbawm, 1962; E.P. Thompson, 1963]. 막시스트 역사가들이 그런 모델을 사용하는 유일한 사람들은 아니다. 아사 브리그스는 여러 지역의 비교연구를 통해 계급의식과 적대적인 계급관계들은 대규모 생산단위의 랭커셔 면방직공업과 관련되어 있었으며, 버밍검의 소규모 작업장에서는 보다 융화적인 관계들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지역단위의 연구는 경제구조와 계급의식?계급행동의 변화 사이의 특별한 연관관계에 관한 자세한 연구를 가능하게 해주는데, 이는 전국적 수준에서는 매우 개괄적으로 할 수 밖에 없는 작업이다.
두번째 모델은 여전히 장기간에 걸쳐 작용하는 변화에 주목하지만, 장기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경제적 요인들, 특히 식량과 인구에 더욱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도시-농촌간 이주에 관한 상공회의소의 설명에서 보면, 사람들을 도시로 이동시키고 …
2. 위기를 받아들이는 태도
64]. 유럽의 사회운동은 단기지속적인 식료품가격과 실업위기들과 밀접히 관계하여 ‘약진’하면서 불규칙하게 발전하였지만, 그런 요인들이 각각의 위기에 대한 대응의 성질과 규모의 차이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1740년대에는 식량폭동이었고, 1790년대에는 페인주의적 음모였으며, 1839년과 1842-4년에는 차티즘과 노동조합이었다. 어째서 대응의 내용에 변화가 있어야 했는가? 그 대답은 장기적 변화에 의해 만들어진 긴장들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1790년 이후의 몇십 년 동안 경제적 관계들에 있었던 일들이 계급사회를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삼백 년에 걸쳐 천천히 발생하였다. 정말 일어났던 것은 그 안에서 상업적?자본주의적 생산이 더이상 안정을 유지할 수 없는 경제적 조건의 창조였다. 이러한 결과가 노동세력의 매우 다른, 그러나 중요한 네 계층에 어떻게 나타났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농업노동자는 그들이 노동세력의 가장 큰 부분을 이루고 있었다는 점뿐만 아니라 그들과 그들을 배출한 소토지보유 농민계층이 공업의 성장에 핵심적인 도시 임금노동자 세력의 근원이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산업혁명기에 대중운동에 참여한 사람들 중, 위로 한 세대 거슬러 올라가서 농촌출신이 아닌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마르크스에게 그러했듯이, 모리스 돕(Maurice Dobb)에게 있어서 엔클로우저와 마지막까지 유지되어 온 관습법(공동방목, 공동경쟁, 공동 연료채집)의 붕괴는 미래의 산업프롤레타리아트를 도시로 밀어 넣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토롤드 로저스(Thorold Rogers)는 이것이 ‘법률에 의해 꾸며진 음모였으며 그 성공에 이익이 걸린 정당들에 의해 수행되었다’고 주장했다.10 상공회의소의 인구통계학적 작업은 어떤 것도 그렇게 단순하게 진행된 일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였다(EcHR, 1953). 농업효율의 개선은 노동수요의 증가를 가져왔기 때문에 엔클로우저된 마을의 인구는 18세기 후반들어 늘어났다. 이 도시 저 도시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은 1760년에서 1780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