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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의 탄생 시기와 장소에 대하여
기원전 1500년경, 오늘날의 중앙아시아에 해당하는 카스피해와 이란고원 쪽에서 밀고 내려온 아리아족은 인더스강을 건너 갠지스강과 그 지류를 따라 인도 북부지역으로의 진출을 꾀했다. 그 과정에서 기존 원주민들과 새 개척지를 상대로 잦은 교전과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로 인해 득세한 무사와 상인이 신흥계급으로 등장했으며, 그들의 힘과 축적된 부를 등에 업은 아리아족은 토착부족들을 통합하며 더욱 강력한 전제군주제를 행할 수 있었다.
한 사람의 왕이 수많은 백성들 위에 군림하듯 종교에 있어서도 다양한 자연신들이 서서히 하나의 신으로 통합되기에 이르렀다. 우주를 창조한 그 신의 이름은 브라마Brahma(범천梵天)였다. 브라만Brahman(바라문婆羅門)은 그 브라마로부터 나온 우주의 근원적인 원리 또는 정신을 의미한다. 브라만은 브라마의 입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특권계층의 인간집단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렇듯 신과 우주가 일체라고 보는 사상은 마침내 범아일여梵我一如, 즉 ‘나’라는 본성과 신을 하나라고 보는 범신론汎神論적 우주관을 낳기에 이르렀다. 일원론적인 인격신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그에 따라 신을 섬기는 제사형식은 더욱 복잡하고 체계화되었으며, 제사를 주관하는 아리아인들은 자신들을 범천의 후예라 하여 신성불가침적인 특권과 지위를 독점했다. 그것은 신에게서 선택 받은 종족과 그렇지 못한 종족의 우열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사회구성원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자신들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그 결과 사회 구성원을 브라만(사제), 크샤트리아(무사), 바이샤(평민), 수드라(노비)로 구분하는 카스트제도가 생겨났다.
한데 기존의 부족국가 규모로는 이처럼 정치, 사회, 경제, 종교 등 모든 방면에서 불기 시작한 변화를 수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 결과…
그렇다. 석가모니가 살았던 카필라성은 현재는 네팔에 속한 땅이다. 네팔의 주민은 아리아계와 몽골계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기존 원주민은 몽골계였겠지만 이주민인 아리아족들의 계속된 유입으로 현재의 인구분포를 이루게 되었을 것이다. 특히 아리아계인 코살라국의 침략으로 석가국이 정복 정도가 아니라 멸문지화를 당했다는 기록은 이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리고 정치제도적으로도 석가국은 당시 히말라야 산맥 기슭을 따라 분포되어 있던 다른 몽골계통의 부족국가들처럼 원시적인 형태의 공화제를 실시하고 있었다. 또한 석가모니의 모친인 마야부인은 몽골 부족 중 하나로 알려진 콜리족 사람이었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석가모니가 아리아계가 아니라 몽골계라는 의견이 신빙성을 얻고 있다. (잠농 통프라스트, 〈붓다의 생애에 관한 나의 정치적 생각〉, 이마성 옮김, 2000
그렇다면 왜 석가모니는 인도인으로 알려졌을까. 첫째 석가국이 인도아리아계인 코살라국에 의해 정복당함으로써 인도권으로 신속히 동화된 점을 들 수 있다. 그런데다 석가모니가 정각을 이룬 곳과 입적한 곳, 그리고 불교를 전도한 곳이 대부분 인도 북동부에 속한 지역이었다. 그리고 기원전 3세기 경 인도를 최초로 통일한 아쇼카왕에 의해 불교가 국교로 받아들여지면서 불교는 다른 나라에까지 널리 전파되기 시작했다. 즉, 석가모니가 득도하고 열반한 곳도 인도요, 활동한 곳도 인도요, 불교가 탄생한 곳도 인도요, 불교가 융성한 곳도 인도이다 보니 석가모니는 자연스럽게 인도인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사실 석가모니가 인도인이 아니라고 하는 표현에도 무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당시 석가국이 위치했던 지역 역시 넓은 의미에서 인도권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가족이 피정복 민족이며 인도인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순수 아리아계가 아닐 것이라는 점에 근거할 때 석가모니가 인도인이라고 하는 것 역시 무리한 표현이다. 그러나 국적이 어디고 인종이 어떻고 하는 것은 정작 석가모니 본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