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생 시몽 및 생 시몽주의자들에 대한 연구
1. 들어가며
주의깊게 정의할 경우 생-시몽(Claude Henri de Saint-Simon: 1760-1825)은 社會主義者로 규정될 수 없다. 社會主義라는 용어가 그의 이름과 연결된 것은 여러 형태 중의 하나인 생-시몽주의가 그의 死後에 社會主義적인 것이 되고, 마찬가지로 생-시몽사상의 일부 핵심적 주제가 근대 社會主義의 중심적 요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면밀하게 검토할 경우 상-시몽의 생애는-그리고 심지어 핵심적 상-시몽주의자들의 생애는 다채롭고 아주 기묘해 보인다. 그는 루이 14세(Louis XIV)의 廷臣이었던 생-시몽공작(Duc de Saint-Simon)家의 방계에 속한 전통적인 귀족 출신이었다. 변화무쌍한 경력에 의하면 그는 아메리카 혁명가편에서 싸웠고 프랑스로 돌아온 이후에는 기요틴의 형벌을 간신히 면했다. 집정정부시대에는 富와 명성을 얻었으나 결국은 재산을 잃고 파멸의 고통을 겪었고, 드디어는 정신병원에서 한동안을 보내야 했다. 그의 사후에 생-시몽敎團이 나타나서 신세대의 도래를 선언하였는데, 다른 교단은 난잡한 성적해방을 설교하기도 하였다. 제 2帝政이 등장할 무렵에는 (말하자면 1850년대와 1860년대) 금융가, 기업가, 그리고 정부의 유명한 관리들이 그의 사상을 공개적으로 예찬하였다.
2. 생 시몽의 사상 검토
푸리에나 오우엔과 비교할때 생-시몽의 사회적 지위는 그로 하여금 자본주의 성장의 부정적 부류들과 직접적 관계를 갖게 하지는 않았으며 그는 사실 그런 부류들을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집정정부 하에서의 그의 경험은 이 점에서 주목할만 하다. 테르미도르반동 이후에 번영한 재정가 및 투기군들의 친구요 제…
민주주의 (인민지배라는 의미)와 자유주의를 거부하고 규율있는 생산성을 지지한 상-시몽의 견해를 근대인들은 자발성이 억제되고 다양성, 비정통적 생활양식, 혹은 반대의 견해 등이 전혀 용납되지
애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장애물들은 예상되었던 것으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기록된 모든 역사는 새로운 집권층과 지위보전을 위해 무익한 투쟁을 하는 구식의 낡은 집단간의 필적하는 투쟁이라는 것을 실증해 주기 때문이다.
특히 후대의 社會主義적 지지자들에 의해 다듬어진 생-시몽의 견해는 육체적 노동자들을 이른바 산업계층의 일반적 범주 안에 포함시키기는 했으나 그들을 지배적이거나 중요한 지위에 두지는 않았다. 육체노동은 귀중시되고 옛 특권계급의 부도덕한 나태는 금지되어야 하지만 신체제를 구체제와 구분시키는 것은 그러한 노동관이 아니라 사회제도의 재조직 및 기술의 적용이었다. 그러므로 최고의 특권과 권위는 지성과 창조력을 겸비한 능력에리트들이 누려야 하는 것이었다. 생-시몽은 당당한 에리트주의자였다. 그는 육체노동자들이 나름대로 능율적, 합리적 어떤 바람직한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 운영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들은 에리트의 권위와 지도를 필요로했다. 그러나 경영자와 노동자들은 서로 대립하는 입장에 있지 않으므로 그들은 합리적으로 조직된 생산상의 위계조직이 서로에게 유익하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상-시몽은 가난한 사람들-그가 말한 “최대 다수 계층”-의 곤경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지만 사회적, 경제적 평등은 無用의 ‘부정적’ 개념이라고 거부했다. 최대다수계층이 그들의 현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파괴적인 개인주의와 반사회적 경쟁이 고쳐질 수 있는 참다운 기회균등이 보장될 수 있도록 사회는 기본적으로 재조직되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자유주의적 제도들이 그러한 목표들을 달성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합리적 계획과 재조직은 의회나 대의적 기구들이 아니라, 질서와 계층적 통제를 요구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민주주의 (인민지배라는 의미)와 자유주의를 거부하고 규율있는 생산성을 지지한 상-시몽의 견해를 근대인들은 자발성이 억제되고 다양성, 비정통적 생활양식, 혹은 반대의 견해 등이 전혀 용납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