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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선군정치의 등장 배경
1. 선군정치의 등장 배경
북한에서 선군정치가 등장하게 된 가장 큰 배경은 무엇인가? 선군정치는 사회주의권 붕괴, 김일성의 갑작스런 사망, 심각한 자연재해로 인한 최악의 경제난, 남한에 의한 흡수통일 우려, 핵개발을 둘러싼 미국 등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체제위기에 처한 북한이 난관을 극복하기위해 들고 나온 전략적 선택이었다. 무엇보다 소련의 해체와 동구 사회주의권의 붕괴에 따라 김정일이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정당성(legitimacy)과 정체성(identity)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김정일은 소련을 비롯한 거의 모든 사회주의 형제 국가들이 사회주의를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왜 사회주의를 유지, 고수해야 하는지를 주민들에게 설명하고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음으로 김일성 없는 김정일 체제를 조기에 정착시키고, 그의 권력을 공고히 하면서 체제위기의 근본문제인 식량난, 외화난, 에너지난을 극복하고 핵과 미사일을 개발해야 하는 큰 부담을 안고 있었다. 부자 권력승계에 따른 정통성의 부족을 효율성으로 만회해야 하는 김정일로서는 당장 기아에 허덕이는 주민들의 배를 채우는 데 정치 생명을 걸어야 할 정도로 북한 경제는 매우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이러한 1990 년대의 위기는 북한이 일찍이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위기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체제수호담론(體制守護談論)으로 제시된 것이 주체사상에 기초한 ‘우리식 사회주의(Our Own Style Socialism)’ 이며 ‘우리식 사회주의’의 실현방식으로서 군을 정치의 전면에 내세워 체제수호 및 국가관리의 정치방식으로 등장한 것이 선군정치라 할 수 있다.
2. 선군정치의 유래와 기원 및 등장 과정
북한은 김정일의 선군정치가 1995년 정초를 기점으로 창시됐다고 밝히고 있다. 북한은 김일성…
의를 고수할 뿐 아니라 더욱 발전시켜 나가신다』(김철우, "김정일장군의 선군정치", 평양: 평양출판사, 2000, p.264).
이 시점은 사실상 북?미 제네바기본합의(Agreed Framework)가 타결된 때(1994. 10. 21)로 여겨진다.
기록상으로 볼때 북한에서 ‘선군’이란 용어가 맨 처음 공식 등장한 시점은 1997년이다. 조선중앙방송은 이 해 10월 7일 정론을 통해 김정일이 “경제에 아무리 부담이 크더라도 선군후로(先軍後勞)하라”고 지시했다고 보도함으로써 ‘선군’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소개했다. 한편 로동신문이 1998년 4월 25일 조선인민군 창군 66주년기념 사설에서 김일성의 군사상을 ‘선군혁명사상’, 김정일의 군사상을 ‘군중시사상’으로, 김정일의 군중시정책을 ‘선군혁명령도’로 지칭하면서 이 용어는 주민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선군정치’라는 용어는 1998년 5월 26일 로동신문 사설 <군민일치로 승리하자>에서 처음 등장했다. 공교롭게도 이 날은 북한이 제네바 기본합의(Agreed Frame)를 위반하면서 파키스탄과 협력하여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한 시점이다. 파키스탄은 1998년 5월28일과 5월30일 이틀에 걸쳐 핵실험을 강행했다. 무려 여섯 차례의 실험(28일 5차례, 30일 1차례)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핵보유국으로 등장한 것이다. 5차례는 우라늄탄 실험이었고 마지막 1차례는 플루토늄탄 실험이었다. 그런데 당시로는 파키스탄이 플루토늄탄 제조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북한의 플루토늄핵폭탄에 대한 실험을 대신 해줬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이는 북한이 핵 억지력을 선군정치의 본질로 삼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시사하는 중대한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어 1998년 9월에는 최고인민회의 제10기 제1차 회의가 열려 헌법개정을 통해 주석직을 폐지하고 김정일을 종전보다 위상과 권한이 강화된 국방위원장에 재추대하면서 선군정치는 제도화 된다. 그리고 1999년 신년공동사설에서는 ‘선군혁명령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