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근대 이전의 사회주의
1. 고대 사회주의 개념의 출발
서구 문화의 주된 지적 유산들인 그리스-로마(Greaco-Roman) 및 유대-기독교의 전통들은 社會主義적 사상의 原形을 풍부하게 지니고 있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이스, 로마, 유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잘 알려진 시기는 부자와 빈자, 착취자와 피착취자들 사이의 격렬한 대립에 관한 이야기로 충만해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국가론??(Republic)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광범위한 철학적 사색 혹은 ‘유토피아’ 사상의 최초의 가장 훌륭한 사례로 간주되어도 좋을 것이다. 그 책에 상술되어있는 프로그램-사유재산제? 가족제도? 기타 私生活보장(혹은 ‘이기주의’)의 폐기, 정치적 기능에 따른 합리적 위계질서의 확립, 덕망있고 이타적인 출신의 지배자 창출에 관한 최우선의 관심 등-은 후대의 유토피아적 사색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플라톤의 모델은 그같은 영향을 행사한 유일한 모델은 결코 아니었다. 플라톤이 친숙하였고 그의 이론들을 거기에서 발전시킨 그리스의 여러 도시 국가들, 특히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언제나 매력적인 사례들을 제공해 왔다. 그리스의 도시국가, 혹은 폴리스(polis)가 그 시민으로 하여금 시민적? 정치적 (political이란 낱말은 polis라는 낱말에서 유래했다) 문제들에 완전히 참여하도록 유도한 특별한 방식은 하나의 강력한 理想으로 존속해 왔다. 그리스의 정치철학자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적 공동체, 즉 폴리스에의 참여를 통해서만 인간성의 잠재력은 충분히 발휘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일부 무정부주의자를 예외로 한 근대의 모든 社會主義者들은 다양한 형태로, 폴리스의 활기찬 이해관계?공동체관과 상호관계에 관한 관념을 회상-진정 능가-할 수 있는 근대적 제도의 창조를 바라고 있었다.
2. 기독교 문화와 사회주의
유대-기독교적 전통…
인주의적 주장(혹은 ”자만“) 등으로부터 초기 기독교도들의 단순함과 이타적 미덕으로 복귀할 필요성을 되풀이하여 강조했다.
반면 그리스도의 메시지와 그에 대한 초기 기독교도들, 특히 바울(Paul)에 의한 해석은 유대인들의 종교적 편견들을 보다 보편화하고 또한 보다 폭 넓은 그리스-로마적 문화에 개방함으로써 그 편견을 급격하게 변형시켰다. 그것은 한편으론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의 수다한 가치관을 거부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그리스의 철학과 로마의 법률을 결합시키면서 그 문화를 수용하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하였다. 초기 기독교의 빈곤과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모든 사람들-심지어 醜男(醜婦)? 병자? 육체적 불구자-에 대한 찬미는 세련된 형식과 미를 사랑하고 또한 빈자의 辛苦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그리스-로마인들의 강력한 귀족적 가치관과 정면으로 대립했다. 하나의 상징적 존재로서 십자가에 처형된 그리스도는 밀로의 비이너스(Venus di Milo)에 정면으로 대립했다. 플라톤의 哲人君主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모여든 결솔하고 불결한 대중들을 노예로서의 역할을 하는데 적합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근대의 社會主義者들은 빈자들에 대해 오만했던 그리이스-로마인이 아니라 그들에게 동정적이었던 기독교도와 더불어 감정을 공유했다. 유사한 발전들이 여러 단계에서 계속 일어났다. 초기의 기독교도들은 재산을 사유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유하면서”, 개인의 욕망을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공동체의 필요에 종속시키면서 공산주의적으로 생활하려고 노력했다(예컨데 再洗禮敎派의 분파인 후터파(Hutterites)는 종교개혁 이후 그 이상을 굳건하게 수용했고 20세기에도 그것을 계승하려고 노력한다). 社會主義者들이 자본주의자들을 탄핵하듯이 초기의 기독교도들은 부자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주장했다. 최후의 심판일(The Day of Judgement)은 혁명의 날과 명백한 유사성을 가지며, 크나큰 고통의 시기 다음에만 도래하는 기독교적 개념의 구원은 자본주의의 발전을 社會主義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