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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말 노동문제에 대한 언론조작 현황
1. 노동문제에 대한 왜곡보도의 일상화
기본적으로 노동문제에 관한 왜곡보도 시비가 없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이것은 일면 노동문제 취재가 그만큼 어렵다는 점을 일깨워 주는 것이기는 하나 본질적으로는 언론관행 스스로가 한쪽 편, 즉 사용자 편에서 모든 것이 출발하고 있음을 반증해 주고 있기도 하다.
이것은 또한 노동운동에 대한 경도된 시각이 사회저변에 보편적으로 깔려 있는 점을 감안하면 일면 수긍할 수 있는 범주도 있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은 그것이 운동 차원도 아닌 노사분규 차원에서 사건 자체를, 사용자 편에서 최초부터 서 버림으로써 생기는 언론보도의 오류가 남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 큰 문제는 그것마저도 아예 보도일선에서 지워버리는 현상이 노골적으로 발생했던 경험이 한국언론 전반에 명백히 깔려 있다는 점이다.
그 경험은 소위 89년 봄부터의 공안정국하에서 발생한 것이기는 하나, 그 결과가 매우 엄청나다는 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다시 그 시기 이후에는 아예 왜곡시비거리도 찾아볼 수 없었다는 현실적 명제로 이어졌다.
이를 시기별로 정리하면 공안정국형성에 결정적 기여를 했던 시기, 즉 울산사태를 기점으로 ‘노동운동과 노사분규=파괴와 폭력’이라는 도식을 이끌어 내기 위한 ‘상습적 왜곡보도시기’가 있고, 두 번째는 재차 노동운동을 사회적인 적, 즉 경제성장의 걸림돌로 매도하는데 언론이 앞장섰던 ‘경제위기조장기’가 그것이고, 셋째는 공안정국이 어느 정도 위력을 발휘하면서 아예 산업현장에서 벌어지는 노사분규를 언론보도에서 전혀 취급하지 않는 ‘실종시기’가 그것이다.
이 시기 이후부터 89년 말까지, 그러한 ‘언론보도 원칙’은 상당히 충실히 지켜졌고, 그것이 그나마 다시 사회적 문제로 부각됐다가 또 다시 실종되기 시작한 결정적 사건, 즉 ‘무노동 무임금’ 문제가 마지막 네 번째 시기에 해당된다.
이것…
2. 울산사태 : 파업노동자 고립화에 언론이 앞장
지도부인 것처럼 부각됐으나 실상은 노조의 집행력에 상당한 손실을 초래했다.
‘경영합리화’를 재벌총수로부터 명령받은 월급쟁이 사장의 입장은 사회여론으로부터 노조의 고립화를 유도하는 것이었고, 이석규씨의 죽음(경찰개입, 취루탄난사)이라는 악재에도 불구 사업장을 노조 측이 도리어 폐쇄시키자 ‘매스컴 플레이’로 승세를 잡아버렸으며, 최종단계에서 실질적 사용주인 김우중 회장이 현지에 내려와 전적으로 타결을 이끌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 갔다.
이때 대우병원(勞)과 옥포관광호텔(使)로 완벽히 갈라져 대화가 단절되고 폐쇄?통제된 가운데 4킬로미터 사이를 자유롭게 오간 유일한 발걸음은 1백여 명의 기자였다. 이외에도 ‘공권력 개입=죽음’이라는 변수 때문에 이상수 변호사 등 재야인사들이 ‘중재’를 자청해 완벽해 대화차단에 중재의 길이 트이는가 했지만, 매스컴의 ‘합일된 일격’에 이들은 무력화 됐다. 이로써 노조집행부를 불안에 떨게 했으며 농성노동자의 입장과는 달리 비밀협상을 통해 사용주 측 안에 스스로 접근하는 추태를 범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매스컴의 8월 26일 ‘분규타결에 외세개입, 노조집행부 재야에 놀아나’식의 일제보도가 터지면서부터 이다.
이것은 노조집행부의 왜소화는 물론 교섭 안에 대한 공개토론마저 회피하고 핵심지도부만이 은밀히 모이고 협상을 진전시키는 사태를 유발했다.
오지에 가까운 옥포사람(대부분 대우조선 노동자와 가족들)들은 협상진전은 전혀 모른 TV뉴스와 배달되는 신문을 통해 알게 되는 정보가 전부였고 이것은 공감대 형성의 주요기제였다. 처음에는 왜곡보도에 대한 흥분이 있었으나 점차 정보의 고립에서 매스컴의 위력에 짓눌려 버린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놀라운 사실은 ‘노조’ ‘단체협약’ 등에 대해 지식이 전혀 없고 농성 과정에서 급작스레 ‘간부’라는 직함을 부여받아 당혹해 하는 노조간부에게 자유로이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된 ‘유일한 외부인사’격인 기자들 중 일부가 농성장 안에서는 간부를 회유?설득하고 밖에서는 ‘기관원’들과 만나는 장면이 대낮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