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는가?
제1차 세계대전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다. 터키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러시아는 발칸반도에서의 영향력 증대를 목적으로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워 슬라브 민족끼리의 단합을 꾀하였고, 그들의 독립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이에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범슬라브주의에 맞서게 된다. 게르만 민족을 주축으로 한 범게르만주의를 주창하게 되는 가운데, 독일을 통일한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를 고립시키기 위해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를 끌여들여 삼국 동맹을 맺게 된다. 이에 유럽의 세력균형을 중요히 여기는 영국이 나서 프랑스와 러시아를 끌여들여 삼국 협상을 형성하게 된다. 이로써 유렵 대륙은 삼국동맹과 삼국협상 두 세력의 대결구도로 나아가게 된다.
특히, 이 시기 각 유럽국들은 민족주의의 발호와 그에 따른 제국주의의 출현과 산업화에 따른 생산력의 증가에 따른 시장 확보라는 측면에서 식민지 쟁탈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러한 정세 속에서 식민지 쟁탈전의 후발주자 독일은 타국의 관심이 비교적 적은 지역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소아시아와 중동지방, 즉 근동지방 확장을 목적으로 베를린과 비잔티움, 바그다드를 연결하는 3B정책을 펼치게 된다. 그러나 이미 영국은 카이로-케이프타운-캘커타를 잇는 3C정책으로 인도양과 아프리카 대륙에서의 주도권을 쥐려고 하고 있었고 3B정책으로 인도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을 위협당하게 된 영국과 발칸반도로의 진출을 위협받게되는 러시아가 3B정책에 반발하며 대립이 시작된다. 이에 각국 간의 군비경쟁이 시작되고, 유럽은 “언제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속으로 빠지게 된다.
그러던 가운데 리만 사건과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발칸전쟁을 거치면서 동맹 측과 협상 측의 대립이 첨예화된 가운데, 독일 장군 리만을 터키 제1군의 사령관으로 터키…
전쟁이 장기전의 양상을 띠게 되자, 중립국들의 참전이 두드러졌다. 터키는 전운이
라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 과정과 전쟁 개시를 전후하여 독일의 판단은 차례차례 빗나가게 되고, 분쟁의 국지화 가능성도 없어지게 되며 유럽세계는 거대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하자 독일은 7월 31일 총동원령을 발동하고 8월 2일 벨기에 침공을 선언한다. 이에 영국이 참전을 결정하게 되고, 러시아는 1909년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병합과 1913년 발칸전쟁 당시 세르비아를 지원하지 못한 외교적인 실패를 거듭하지 않으려는 확고한 입장을 취하였다. 러시아 군부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군사 조치는 독일에 대한 전쟁을 내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에 독일 국경에 대해서도 군사 이동을 단행하며 7월 29일 총 동원령을 내리게 된다. 이에 러시아·영국·프랑스와 오스트리아·독일의 전쟁이 발발하게 되지만, 3국동맹의 당사자인 이탈리아는 중립을 선언하였다. 오스트리아의 행동이 3국동맹의 방어적인 정신에 위배되어 원조의무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세계외교사p578, 김용구, 2006).
독일의 군사전문가들은 전쟁이 속전속결로 끝나리라 예상하였다. 프랑스군을 단시간에 격파하고 주력부대를 러시아 전선으로 투입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전투가 진행되자 처음 예상했던 속전속결에 의한 전쟁종결의 전망은 곧 사라지고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참호전으로 돌입하였다. 전쟁은 소모전 양상을 띠게 되고, 전선은 고착화되었다. 이러한 전쟁양상은 공업 발달에 따른 대량생산 체제와 철도의 발달에 따른 신속한 수송능력에 기인한다. 따라서 양측은 모두 결정적인 공격을 할 수 없게 되었지만 독일은 고착화된 서부전선에서의 승기를 잡기 위해 총력전을 시도하였다. 독가스와 탱크가 등장하였고, 독일은 미국의 참전 우려에도 불구하고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펴게 된다(세계외교사pp581-582, 김용구, 2006).
전쟁이 장기전의 양상을 띠게 되자, 중립국들의 참전이 두드러졌다. 터키는 전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