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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 Norman Bethune 의 삶에 대한 조사
그의 행적은 의사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은 누구나 꼭 한번은 들어야 할 만큼 경이적이고 열정적인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그의 희생과, 사랑, 열정, 창의력, 초인적인 정신력은 인간에게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떻게 가능해지는지를 확인시켜준다. 그리고 베쑨을 알게 된 누군가는 그런 희망을 불태우는데 자신의 인생을 바치려고 애쓸지도 모른다. 그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의무감 하나만으로 홀홀 단신 건너간 이국 땅 중국에서, 그가 마흔 아홉 살 나이로 마지막 숨을 거두었을 때 중국 인민들은 통곡했다.
당시 중국 공군총사령관이던 주덕은 그의 죽음을 맞아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모택동은 그의 동료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한 인간의 서거 이상의 것을 통곡 합니다”
한 인간의 죽음이 한 인간 이상의 것은 세상의 것이 되게 한 그의 죽음의 의미는 그가 걸어왔던 삶과 그가 만났던 사람들의 가슴속에 고스란히 각인 되어있다. 그런 그의 그 삶이란 자신보다 환자를, 부자보다 가난한 자들을, 불의보다 정의를, 안이함보다 투쟁을 실천해 왔던 삶이었고 누구도 감당하기 힘겨웠던 고난의 삶이었다. 포탄이 터지는 일선에서 60여 시간을 잠 한숨 자지 않고 적군을 포함한 백 수 십 명의 부상병들을 수술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일본군의 눈을 피해 칼바람 부는 광활한 중국 땅을 열 며칠씩 행군하고, 작은 열살박이 소녀의 죽음 앞에 가눌 수 없는 분노와 슬픔과 불안으로 밤을 지새던 진정한 의사의 삶이었다.
노먼 베쑨(Norman Bethune)은 캐나다인이다. 1890년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그레이븐 허스트에서 목사인 아버지 말콤 니콜슨 베쑨과 어머니 엘리자베스 앤 굿윈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베쑨 가문은 원래 프랑스의 위그노 교…
떤 전선에서는 단 5분만에 2만 명이 죽거나 부상당했다고 하는 1차 세계대전. 이 한가운데 베쑨은 의무병으로 참전했다. 사단 병원 같은 후방에서 근무했던 의무병이 아니라 참호에 배치된 진짜 의무병이었다. 돌진하다가 부상한 병사를 재빠르게 운반해 와야 했던 의무병이 처할 수 있는 위험은 보병 못지 않았을 것이다. 참고로 이 당시 히틀러는 전령이었다. 전령도 의무병과 비슷한 패턴으로 일한다. 전진하는 보병과 후방의 참호 사이를 뛰어 다니며 임무를 전하는 것이 전령이었으므로 오히려 보병보다 더 위험했다.
베쑨은 이 참혹한 전장에서 살아남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허무주의였다. 생명은 소중하니까 가치있게 살아야 한다는 식의 미국 보수주의 전쟁영웅담이 아니었다. 언제라도 생명을 잃을지 모른다는 압박감 속에서 살아왔던 걸 보상받기 위해서, 생명이 원하는 것을 베쑨만 아니라 참전용사 대부분이 바랬다. 그건 다름 아니라 쾌락이었다. 베쑨 역시 `잃어버린 세대`에 속했던 것이다. 아니, 그는 `잃어버린 세대`의 대표주자였다. 좋은 옷, 좋은 술, 아름다운 여자, 퇴폐주의. 베쑨은 영국에서 미술품중개업과 인턴을 하는 한편, 번 돈으로 쾌락적 생활을 영위한다. 하지만 쾌락주의는 허무주의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왜냐하면 쾌락이란 가치와 대척점에 서 있으며, 가치가 없는 생활 다시 말해서 일정한 방향이 설정되어 있지 않은 생활은 허무하기 때문이다.
그가 해답이라고 찾은 것은 사랑이었다. 1923년, 11살 연하이자 스코틀랜드 명문가의 딸 프란시스 캠벨 페니와 결혼한다. 결혼 후 유럽대륙으로 건너가 유명한 외과의사들 밑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그러나 사랑은 오래 가지 않았다. 쾌락과 허무의 바다에서 사랑이라는 섬에 상륙하고자 했지만 파도는 섬을 쉽사리 뒤엎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수순은 자기 일에 몰두하는 것이다. 공부가 끝난 후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돈을 많이 벌 심산으로 병원을 개업한다. 점차 실력을 인정받게 되었다. 하지만 일마저도 안착할 섬의 역할을 해주지 못했다.